김진호 한국체대 교수가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한국체대 양궁장에서 자신의 ‘양궁 인생’을 설명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 女양궁 원조 신궁… 김진호 한국체대 교수
1978년 아시안게임 韓양궁 첫 금·다음해 세계선수권 5관왕 당시 김연아급 인기…‘올림픽 효자종목’ 자리매김에도 기여 LA올림픽서 후배 서향순에게 밀려 금메달 좌절…동메달 그쳐
충격 컸지만 긍정적 자극으로 승화 “패한 선수들 맘 이해” 3월 IOC ‘여성과 스포츠상’ 수상…이에리사 이어 두번째 한국체대 교수서 퇴임하면 전국 유망주에게 재능기부 할것
김진호(59) 한국체대 교수는 한국 여자양궁의 원조 신궁(神弓)이다. 김 교수는 1970∼1980년대 한국 스포츠의 간판스타였다. 김 교수는 예천여고 2학년이었던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개인전에서 금메달,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양궁의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이었다. 이듬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선 30·50·60m, 개인종합, 단체전 등 전 종목을 휩쓸며 5관왕에 올랐다. 당시 대한궁도협회에서 전통 무예인 국궁과 양궁을 전담했다. 신궁 김 교수의 등장으로 양궁은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김 교수는 세계무대에선 최고의 궁사로 인정받았다. 그는 상승곡선을 이어갔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을 획득했고, 198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또다시 5관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기대를 모았던 올림픽에선 아쉬움을 삼켰다. 1984년 LA올림픽 개인전 동메달. 김 교수는 2년 뒤 열린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3관왕에 올랐다.
당시 김 교수의 인기는 ‘피겨 여왕’ 김연아(30)에 버금갈 정도로 높았다. 국제대회를 휩쓸 때마다 카퍼레이드를 펼쳤고 거리로 나온 수많은 국민은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1980년에는 그의 고향 예천군에 그의 이름을 딴 ‘진호궁도장(현 예천진호국제양궁장)’이 세워졌다. 양궁은 올림픽 효자 종목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양궁은 LA올림픽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까지 금메달을 모두 23개 쓸어담았다.
김 교수는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3월 7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여성과 스포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IOC는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수상자를 발표한다. IOC는 “김 교수가 한국여성스포츠회와 대한체육회 여성체육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한국 스포츠계 여성 권익 향상에 힘썼다”며 “명궁회(한국 올림픽 여자 양궁 메달리스트들의 모임)를 결성, 많은 소녀가 양궁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김 교수는 2006년 탁구의 이에리사(당시 대한체육회 선수촌장)에 이어 한국 여성 스포츠인으로는 역대 2번째로 이 상을 받았다. 시상식은 3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취소됐다.
김 교수를 지난달 28일 그의 일터인 서울 송파구 오륜동 한국체대에서 만났다. 그는 “앞으로도 한국양궁과 스포츠 발전에 더 이바지하라는 의미로 (여성과 스포츠상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2018년 12월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 대한체육회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김 교수는 “주변에선 스포츠 영웅이라고 하지만, 1970년대 척박한 시기에 양궁을 도입하고 불모지를 개척하신 선배들이 있었기에 꽃길을 걸을 수 있었다”면서 “현재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예천여중 2학년이었던 1975년 처음 활을 잡았다. 그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먼 거리를 날아가 과녁에 꽂히는 게 정말 멋있었다”면서 “다음 날 양궁부를 찾아갔다”고 기억했다. 김 교수는 “동기들이 기본기를 끝마친 겨울방학 무렵 양궁부에 들어갔고, 동기들보다 늦게 양궁부 언니들로부터 빈 활 당기기를 배웠다”면서 “그 시절엔 연습용 활 하나로 양궁부원 전체가 돌아가면서 훈련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예천여고 1학년이었던 1977년 10월 광주시에서 열린 제58회 전국체전에서 여고부 개인전 공동 1위에 올랐고, 이듬해 8차전까지 치른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해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김 교수는 “시골에서 자랐기에 서울 생활은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면서 “선수촌에 입촌한 뒤 한 달 동안 내내 울었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으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LA올림픽. 김 교수의 금메달을 의심한 이는 국내외에서 없었다. 냉전으로 인해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서방 진영을 중심으로 66개국이 불참했다. 한국도 불참했다. 4년 뒤 열린 LA올림픽. 벼르고 별렀던 김 교수는 그러나 동메달에 그쳤다.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양궁은 특별 관리 대상이었기에 그는 다른 종목 선수들보다 한 달 먼저 LA로 갔다. 완벽한 현지 적응을 위해서. 하지만 오랜 기간 현지에 머무르는 바람에 신체 리듬이 흐트러졌다. 특히 올림픽 금메달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선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금메달은 한참 후배인 당시 막내 서향순(53)이 차지했다. 김 교수는 “향순이가 금메달을 획득해 ‘욕’을 먹지는 않았다”면서 “하지만 한때 향순이를 미워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후배에게 밀렸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김 교수는 상처를 입었고 좌절감에 빠져 양궁을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씀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김 교수는 “어머니께서 ‘이왕이면 잘하고 아니면 양궁을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하셨다”면서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활을 잡았다”고 귀띔했다. 김 교수는 충격을 자극으로 바꾸었다. 그는 “(LA올림픽에서) 인생의 쓴맛을 배웠다”면서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올림픽 금메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지금도 이따금 ‘그 어린 나이에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면 얼마나 건방진 삶을 살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면서 “처음으로 경기에서 패한 선수들의 심정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서울아시안게임을 마친 뒤 은퇴를 선언했다. 3관왕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뒤 미련 없이 정상에서 내려왔다. 2년 뒤 서울올림픽이 열리지만, 그는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김 교수는 “날고 기는 선수들과 경쟁을 벌였기에 1등을 하면서도 항상 쫓기는 기분이 들어 너무 힘들었다”면서 “선수생활을 그만두면서 비로소 여유를 찾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95년부터 모교인 한국체대에서 양궁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스승보다 선배로 후배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며 예의범절을 강조한다. 김 교수는 “평생 운동만 한 학생들이기에 졸업하고 사회에 뛰어들면 적응하는 것부터 애를 먹곤 한다”면서 “기본적인 예절만 지켜도 충분히 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학부모들에게 1년 단위로 짠 4년간의 학생 지도 계획을 공개한다. 자녀를 맡긴 학부모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글씨체를 바로잡기 위한 자필 리포트 과제 제출 등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많은 시간, 세월이 흘렀다. 김 교수의 정년은 6년 남짓 남았다. 그는 퇴임한 뒤 선수로서 익힌 노하우, 교수로서 익힌 이론을 새까만 후배들에게 전수하겠다는 제2의 꿈을 키우고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실전 비결, 실전에 유익한 이론을 양궁 유망주에게 전수하는 재능 기부를 ‘기획’하고 있다.
김 교수는 “정말 오랫동안 양궁과 함께했고, 양궁 덕분에 크고 작은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면서 “깔끔한 재능 기부 봉사활동을 위해 체력을 관리하고 건강에 더욱 신경 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