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다가온 스승의날
카네이션 든 제자 올 때마다
쑥스럽고 부끄럽기 끝없어
공감과 해결의 지적 팀워크
내 제자와 얼마나 나누었나
함께 성장 못한 느낌에 슬픔
어느새 5월 1일이다. 또 스승의날이 올 것이니 이를 어쩌나. 대학에 몸담아 교육이라고 한답시고 보낸 세월이 38년이다. 대학교수는 이른바 전문직이다. 장기간의 훈련(교육)과정, 특별한 사회적 소명과 책임, 그로 인한 직업적 특권 등이 전문직에 대한 이론적 조건이다. 예컨대, 교수가 되기 위해 적어도 5년 이상의 대학원 교육과 1∼2년 이상의 박사 후 연수 과정을 거친다. 또한, 전문 분야 연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그것을 교육과 봉사를 통해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 책무를 띠고 있다. 그 대신 일정한 평가를 통과하면 정년(停年)까지 직업적 안정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늘 부끄러워지는 것은, 대학교수가 담당해야 할 교육·연구·사회봉사의 세 가지 책무 가운데서 교육에 생각이 미칠 때다. 스승의날(5월 15일)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학생들은 카네이션 꽃을 들고 연구실을 찾으며, 사회로 진출한 제자들은 간혹 전화나 식사 초대로 감사를 전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쑥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로 시작하는 노래마저 듣는 날에는 솔직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다. 더욱이 온 겨레의 스승인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스승의날로 제정한 의의를 떠올리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분명 내게도 소중한 스승들이 있었다. 경북 문경에서 서울로 그리고 서울에서 미국 시애틀로 진학하면서 겪은, 길고 긴 타향살이의 설움만큼, 그것을 이겨내도록 도와준 고마운 선생님들이 계셨다. 안타깝게도 일부는 이미 작고하셨지만, 그분들에게 진정으로 최소한의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 나이가 들수록 아주 사소한 손길을 주었던 스승들에게도 일종의 도덕적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야 그런 걸 깨닫는가? 아니, 스승과 제자의 교육적 관계를 넘어서, 고마움을 느끼는 인간관계는 도대체 어떤 조건에서 지속 가능한가?
42년 전 가을, 미국 대학원에 입학해서 첫 번째로 선택한 수강 과목은 ‘고급이론’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소화되지 않던 새로운 관점들에 목말라 있었다. 영어로 듣기와 말하기가 원활하지 못하고, 오직 읽기와 쓰기에만 의존하던 시절이다. 나중에 알고서 놀란 일이지만, 담당 교수는 교재도 없이 학생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관점을 강의하는 것으로 악명(惡名)이 높았다. 그런 와중에 수업 내용에 대한 이해도를 체크하는 퀴즈(시험)도 때때로 실시했다.
이것저것 수업들을 따라가느라 매일 밤잠을 설치고 있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이미 늦은 오후였다. 탁상시계에 알람을 해놓고 잠든다는 것이 그만 깜박했던 것이다. 그 이론 과목의 오전 수업시간을 놓친 것이다. 부랴부랴 담당 교수 연구실로 달려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곧바로 교수 옆에서 오늘 실시한 퀴즈를 풀어 보라고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아마도 내 답안지는 한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나마 주어진, 놓친 수업을 ‘보완할 기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교수의 연구실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방문하지 않았다. 교수들조차 그와 대화하는 것은 외계인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완할 기회’ 사건 후 나는 무조건 그 교수의 연구실을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어떤 의문이든 갖고 들어가 담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와 나눈 대화는 며칠 내내 머리를 맴돌면서 온갖 상념(想念)을 불러왔다. 이 경험들이 나의 사고력을 얼마나 혁신적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사전 예약도 없이 그의 연구실, 나중에는 그의 집까지 수시로 들락거리는 나를 용인해 주었을까? 그것도 나의 서툰 영어 대화로 잘 풀리지 않으면, 글쓰기로 서로의 아이디어들을 보다 명료하게 교환하는, 번거로움을 넘어 짜증 나는 과정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대학 시절 배운 흡연을 박사 최종심을 끝낸 바로 그날(1982. 3. 19)에 끊었다. 그 뒤 귀국해서 지금까지 90세를 훌쩍 넘긴 그와 끝없이 담론을 교환하는 기반은 무엇인가?
스승과 제자의 교육관계를 넘어 어떤 인간관계든, 그것의 지속 여부는 이른바 공동 프로젝트를 갖고 있느냐에 좌우된다고 여겨진다. 학문적이든 실용적이든 어떤 문제를 함께 공감하고 해결하려는 욕구가 이어지는 한, 공동 프로젝트에 대한 상호 책무를 떠나기 어렵다. 그런 공동 문제 해결 과정에서 팀워크는 살아나고, 더불어 성장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설사 성공적인 문제 해결에 이르지 않더라도, 곁다리로 얻어지는 기쁨은 서로에 대한 신뢰·배려·행복감 같은 팀 자산(team capitals)이다.
다음으로, 어쩌면 팀워크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도움받을 준비’ 자세가 아닐까 여겨진다. 어떤 능력도 완전할 수 없으므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불필요한 자만심 내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곧 도움받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이런 때 어떤 이의 소중한 도움도 무용지물로 버려지며, 서로 간의 효과적인 팀워크도 작동되기 어렵다. 공정함(fairness)이나 정의(justice)도 진정한 팀워크가 구현될 때 얻어지는 법이다.
지적(知的) 팀워크의 여정을 40년 이상 함께 이어온 나의 스승, 리처드 F 카터(Richard F. Carter)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나의 제자들을 떠올릴 때, 나 스스로 얼마나 ‘도움받을 준비’로 그들과 담론을 나누려고 했는지 부끄러워진다. 함께 성장하지 못한 느낌에 때로 가슴 저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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