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났을 때 며느리가 아닌 어머니가 떨고 계셨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서 못 벗어난 시간이었다. 직장을 잡아 집을 떠나는 아들이 외롭지 않고 더운밥을 먹게 하려고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일을 위해 나오신 어머니가 며느릿감보다 더 수줍어하셨다.
쉰두 살이던 시어머니. 내 눈에는 여자가 아닌 저만치 물러선 노인이었다. 쉰두 살, 지금 그 시간을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직 푸르디푸른 나이인 것을. 결혼식장에서도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해 앉아 계셨다. ‘이런 일을 남편과 같이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내가 들떠있고 행복했으므로 어머니는 안중에 없었다. 어머니의 눈물 따윈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시댁에 갔다가 팔짱을 끼고 나섰고, 어머니는 보따리를 싸 들려주며 잘 가라고 했다. 어머니의 참기름, 어머니의 굵고 여문 깨, 어머니가 기른 오리, 어머니의 달걀…. 우리는 어머니를 뜯어먹고 사는 ‘물것’이었다. 뙤약볕에서 풀을 뜯어 놓고 자정이 될 때까지 하던 키질이 오로지 자식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헤아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노동에 거리를 두었다. 어머니여서,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이라서, 그 숙명은 본인의 것이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달이 컸다.
올봄 내가 사 먹은 나물은 불과 몇 가지다. 시장에 나오는 것은 볕을 듬뿍 받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더디 큰 것이 아니라 비닐하우스에서 물로 자란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지러움을 호소하던 어머니가 황룡 들판을 걸어 다니시며 뜯어다 삶아 꼭 짜서 보낸 것을 놓고, 나는 그 들녘의 식용식물 분포도를 들여다보곤 했다. 불미나리, 자운영, 담뱃대나물, 쑥부쟁이, 냉이 그리고 향이 다른 달래…. 어머니의 ‘꼭 이 시기에 먹어야 약 되는 것’인 양, 속 깊은 정성은 매번 거듭된 것이어서 고마움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집에 가면 어머니와 나는 가끔 손깍지를 끼고 걸었다. 나는 골목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키 큰 며느리를 좋아했다. 어느 집 마당에 알록달록 텐트가 쳐져 있었다. “객지 사는 사위까지 꼭 휴가를 이리 온단다. 방이 하나밖에 없어 잘 준비를 해 온다”는 어머니의 귀띔. 산중으로 찾아오는 그 댁 자녀들이 가상하여 기웃거리다가 잡혀 끌려 들어갔던 적이 있다. 그들은 마당에 걸린 솥에서 국 한 그릇을 떠 한사코 우리를 앉혔다. 마을 앞에 흐르는 황룡강에서 잡은 고기로 끓인 매운탕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들깨를 갈아 넣고 파, 깻잎, 방앗잎, 호박잎까지 동네 풀이란 풀은 모두 넣은 국은 내가 여태 먹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잘 먹는 나를 흐뭇한 모습으로 보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숟갈을 멈추고 내 그릇에 국을 덜어주셨다.
손톱이 까맣고 갈라지는 것이 본 모습인 줄 알았다. 요양병원 생활 몇 년에 어머니의 손은 희고 부드러워졌다. “말하지 않는다고 속조차 없겠냐”는 말이 있는데, 어머니의 표현하지 않음을 믿었던 우리는 비열했다. 어머니라고 좋은 것을 모르며, 어머니라고 달라진 세상을 몰랐을까. 우리 코앞에 놓인 욕망을 실현하기에 급급해 어머니에게 좋은 코트나 가방 한 번 선물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시골 가서 한 방에 잘 때 문바람이 들어오는 곳에서 본인이 자겠다고 우기시던 어머니. 지독한 복통에 검사를 하러 병실에 들어가시며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 더 살아 너희들 사는 것 좀 부드럽게 해주려 했는데 못 하고 가게 되었구나”라고 하시던 분.
그만 우리는 어머니에게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봄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며느리 이혜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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