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 유치·성공은 기적
정주영회장 헌신은 말로 못해”
“올해는 대한체육회 창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여서 남다른 감회를 느낍니다. 대한체육회 창립은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민족지도자들이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고귀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7일 대한민국 체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12회 소강(小崗)체육대상 대상을 수상한 이연택(84·사진) 전 대한체육회장은 “수상을 한사코 고사했으나, 체육회 100년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상을 받기로 했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는 “체육인들은 체육회 창립 정신과 올림픽 정신을 살려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순수 체육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전 회장은 평생을 체육계에 헌신해 한국 체육사(史)의 ‘산증인’이자 ‘체육 행정의 달인’으로 불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서울올림픽 유치 대책팀에 참여하면서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1981년 국무총리실 제1행정조정관으로 민·관·체 합동 서울올림픽 유치 실무총책을 맡았고, 유치 후 조직위원회 초대사무차장을 맡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기여했다.
“솔직히 당시에는 올림픽을 치를 만큼 제반 여건이 무척 안 좋았어요. 학교 운동장 빼곤 동대문운동장이 서울에 유일한 운동장이었으니까요. 1970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했다가 경기장 지을 형편이 안돼 벌금 물고 개최권을 반납했고, 197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우리나라가 유치한 첫 국제대회였을 정도였어요.” 특히 2차 오일 쇼크로 글로벌 경기침체까지 겹쳐 경제적 상황이 너무 어려웠고, 막대한 비용 부담과 개최 후 재정적자 후유증을 우려해 정부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고 했다. “올림픽 유치에 실패했거나 적자 올림픽을 치렀더라면 아마도 공직을 떠나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주영 유치위원장을 비롯해 관계자 모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예상을 뒤엎고 일본을 52대 2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겼어요. 기적이었지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격스럽습니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도 털어놨다. “사실 잠실주경기장은 아시안게임 유치를 염두에 두고 1976년부터 짓기 시작한 건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실사단에는 올림픽을 위해 짓고 있다고 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결과적으로 잠실운동장이 효자 역할을 톡톡히 했어요. 하하.(이 대목에서 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유치 과정에서 돈을 많이 쓴 걸로 알고 있는데, 실제론 돈을 쓰고 싶어도 못 썼어요.”
이 전 회장은 특히, 서울시와 함께 처음으로 ‘공영개발’ 제도를 창안해 “공무원들이 반대하는 데도 사명감을 갖고, 죽기 살기로 밀어붙여 서울올림픽이 역대 최고 흑자 올림픽으로 성공하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후 청와대 행정수석, 총무처장관에 이어 노동부장관을 지냈고, 두 번의 대한체육회장, 2002한일월드컵 조직위원장, 2014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며 쌓아 온 행정 경험을 활용해 많은 예산을 확보, 진천 선수촌 시대를 개막하는 등 대한민국 체육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이 전 회장은 “스포츠는 이제 단순히 보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했고, 앞으로도 성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2001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국제올림픽박람회를 개최했다”면서 “스포츠가 고부가가치 산업임을 서울올림픽과 한·일월드컵을 치르면서 피부로 실감했다. ”고 덧붙였다.
국제무대에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일본을 압도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심을 성취한 점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했다. “일제 때 태어나 늘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어요. 말로만 극일(克日), 극일하면 뭐해요. 경기에서 이겨야지요.” 그는 서울올림픽 유치전 압승이 극일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이어 2002 월드컵에서도 일본은 8강에 그쳤지만, 한국은 기적적인 4강 신화를 이뤄냈다. 아테네와 북경올림픽에서도 일본을 제압했고, 2014아시안게임도 일본을 제치고 2위로 역전해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다.
이 전 회장은 체육 재정의 자립기반 확립에도 힘을 쏟았다. 종전에는 정부의 재정지원에만 의존해 왔으나 흑자 올림픽 덕분에 잉여금 3110억 원 등을 기금화해 국민체육진흥공단을 설립하게 됐다. 또 체육진흥공단 이사장 시절 복권·경륜·경정사업 등을 추진해 지난해 기준 연 1조8000억 규모의 잉여금으로 거의 모든 재정을 충당한 것은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그는 인터뷰 내내 “스포츠는 하나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 학교체육, 장애인체육이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세계를 통틀어 장애인올림픽이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진행된 것은 서울장애인올림픽이 처음이다. 1981년 총리실 제1행정조정관을 맡으면서 1982년 문교부 체육국을 체육부로 최초로 발족시키는 정부조직법을 개정하는데도 산파역을 했다. 그가 지금까지 벌인 일련의 체육 행정들이 최초로 실시한 것이 많다. 한마디로 체육 행정의 ‘개척자’인 셈이다.
고령에도 여전히 전직 국무총리실 직원모임인 ‘국총회’ 회장을 비롯해 동아마라톤꿈나무재단 이사장과 서울올림픽 유치 주역들의 모임인 ‘바덴바덴회’ 회장으로 봉사하면서 체육계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서울 혜화동 이 전 회장 자택 부근 2층 커피숍에서 진행됐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도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고, 돋보기 없이 신문을 볼 만큼 여든넷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30~40년 전의 일에 대해 사실관계와 사람 이름, 수치 등을 정확히 제시해 뛰어난 기억력이 인상적이었다. 등산과 헬스클럽을 다니며 건강 관리를 한다고 했다.
글·사진 =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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