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미술
조주연의 현대미술 속으로 - ⑨ 블라디미르 타틀린
이젤 회화 대신 ‘회화 부조’ 만들어낸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피카소 콜라주와 달리 그림의 흔적 전혀 없어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모형, 물질·기능·역동성 상징에 충실… “10월 혁명이 낳은 제1의 사물” 극찬
우선, 타틀린은 이런 말을 했다. “1917년 사회적 영역에서 발생한 일들은 이미 1914년에 회화 예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실현되었다. 당시 ‘재료, 입체, 구축’은 이 예술가들의 작업에 토대가 됐다.” 이는 사회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미술에서 먼저 혁명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또한 타틀린은 “나에게는 10월 혁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질문이 없었다. 내 온몸은 활기차고 창조적이며 사회적이고 교훈적인 생활에 젖어들어 갔다”고도 했다. 이는 그와 같은 미술가들이 러시아 혁명을 통해 도래할 새로운 사회의 창조에 얼마나 열렬하게 기여하고자 했는지를 알려준다.
혁명적인 미래의 예견과 창조는 관습적인 과거에 대한 성찰과 단절을 전제한다. 1910년대의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그런 과거는 서유럽에서 들어온 순수 미술이었다. 그중에서 입체주의가 특히 중요했는데, 흥미롭게도 당시 러시아 미술가들은 파리 현지의 사람들보다 입체주의를 더 잘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대기업가 세르게이 슈킨이 자신의 프랑스 현대미술 컬렉션을 1909년부터 주말마다 공개했기 때문이다. 1897년부터 시작된 슈킨의 컬렉션은 인상주의를 필두로 해 마티스와 피카소까지 언제나 당대 미술의 최첨단을 수집했으며, 그랬기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컬렉션이 중단되는 1914년까지 프랑스에서 진행된 현대미술의 진화를 러시아에 실시간으로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타틀린도 슈킨 컬렉션을 통해 입체주의를 익혔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피카소에게 직접 배우기 위해 1913년 무작정 파리로 피카소를 찾아갔다.
여비가 다 떨어질 때까지 파리에 머문 한 달 동안 타틀린은 피카소의 화실을 찾아가 자신을 조수로 써달라고 몇 번이고 부탁했다. 이미 1908년에 화가로 데뷔한 정식 미술가가 고작 네 살 연상에 불과한, 거의 동년배의 화가에게 한 부탁이었으니, 타틀린이 피카소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하게도, 타틀린의 부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때로는 아코디언까지 메고 찾아가 연주하는 등 무척이나 정성을 쏟았으나, 프랑스어도 할 줄 모르는 생면부지의 러시아인 화가를 받아주기에는 피카소가 도와야 할 미술가가 그 주변에는 이미 수두룩했다. 그래도 타틀린의 회상에 의하면, 두 사람의 만남은 호의적이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드로잉과 몸짓으로 두 사람이 나눈 의사소통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피카소도 동의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침내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타틀린에게 피카소는 선물로 물감 튜브를 주었다.
극도로 가난했던 러시아의 화가에게 물감 튜브는 대단히 진귀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피카소가 준 프랑스제 물감 아닌가! 그러나 이 귀한 선물이 타틀린에게는 쓸모가 없었으니, 파리에서 돌아온 후 타틀린은 이젤 회화를 버리고 회화 부조라는 다른 형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예컨대, 1914년에 타틀린이 만든 ‘재료의 선택’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액자 안에 회화 대신 부조를 설치한 것인데, 부조의 재료로는 목재, 철판, 스투코, 유리 등 산업 재료를 썼고, 형태와 위치는 이 재료들의 성질이나 기능으로부터 도출했다. 가령, 나무 막대의 직선 형태는 가공 목재가 지닌 평평한 사각의 형태에서 도출한 것이고, 철제 삼각형과 곡선 형태는 자르거나 휠 수 있는 철판의 속성에서 도출한 것이며, 이 형태들의 중간에 놓인 유리의 위치는 내부와 외부를 매개하는 유리의 투명한 속성에서 도출한 것이다.
미술 작품에 산업적인 물질들을 재료로 쓴다는 발상 그리고 미술 작품의 형태를 재료의 물질적 특성으로부터 도출한다는 발상은 타틀린이 파리에서 보았을 피카소의 입체주의 콜라주를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피카소가 1912년 말의 입체주의 콜라주 ‘바이올린’ 같은 작품에서 시도한 것은 간단히 두 가지였다. 1) 입체주의 드로잉과 맞물려 종잇조각을 부착함으로써 회화의 평면성을 분석적 입체주의보다 더 강조하는 것. 2) 종잇조각의 의미(여기서는 바이올린의 몸통과 바이올린 뒤 배경)가 자체의 형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통해 발생하도록 하는 것. 요컨대, 피카소의 관심사는 회화의 물질적 토대를 강조하고 의미작용의 구조를 혁신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사회의 혁명에 앞서 일어난 예술의 혁명이다. 타틀린의 작업을 통해 작품의 원천은 세계의 모습도 아니고 작가의 관념도 아니며 재료의 물성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실로 이중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한 발상의 전환이다. 왜냐하면 타틀린은 세계를 재현하면서 세계를 근원으로 삼았던 현대 이전의 미술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재현을 거부하면서 작가를 근원으로 삼기 시작한 현대의 순수 미술까지도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료로의 전환은 그저 예술의 혁명에만 그치지는 않았다. 타틀린은 재료로의 전환에 이어, 재료의 출처이자 거처인 현실의 공간으로 진출해 ‘물질문화’를 구축하고자 했는데, 이 문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 즉 혁명의 예술이 되는 것이었다.
타틀린에게서 혁명의 예술은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위한 모형’에 집약되어 있다. 혁명 3주년이 되는 1920년 11월 8일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에서 공개된 이 모형은 5.5∼6.5m 높이의 목조 구조물이었지만, 실제 기념비는 강철과 유리로 건설될 예정이었다. 높이는 396m로, 타틀린이 1913년 파리 여행에서 보고 현대 공학의 위업이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던 에펠탑보다 3분의 1가량 더 높게 잡았다. 에펠탑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으니, 그 탑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구조물이 되고자 했던 포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지어지지는 못했으므로 이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틀린의 모형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점이 많다.
모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기울어진 사선 축을 타고 용솟음치며 상승하는 두 개의 나선형 원뿔 프레임 구조다. 그리고 이 나선형 프레임 안에는 유리를 주재료로 쓴 기하학적 입체 구조물 네 개가 일렬로 쌓여 있다. 아래서부터 납작한 원통, 피라미드, 뾰족한 원통, 그리고 반원이 그것이다. 이 기념비를 설계할 때 타틀린이 세운 원칙은 세 가지였다. 1) 물질에 충실한 형태. 2) 기능에 충실한 건물. 3) 혁명의 역동성 상징. 즉 이 구조물은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축하하는 기념비였지만, 단순히 기념비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쓰일 수 있는 건물로도 설계되었던 것이다. 각 입체에는 제3인터내셔널의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정보센터와 옥외 스크린 등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입법부에서 인민의 중지를 모아 행정부에서 정책을 만들고 정보센터를 통해 가공한 뉴스를 다시 인민에게 신속하게 알린다는 구조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타틀린은 이 입체들이 각자의 임무에 합당한 속도로 회전하게 했는데, 입법부의 1회전 속도가 1년이라면 행정부의 1회전 속도는 1달이었고, 정보센터는 1주일 그리고 맨 위의 뉴스센터는 1일에 한 번 회전하도록 했다.
거의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네바강을 가로질러 페트로그라드의 정중앙에 세워질 예정이었다는 이 기념비를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최초의 수염 없는 기념비”이자 “10월 혁명이 낳은 제1의 사물”이라고 상찬했다. 이후 타틀린은 실제 생산 현장으로 들어가 미술가이자 엔지니어로서 혁명적 사물의 대량생산에 이바지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27년에 굽은 나무로 디자인한 ‘의자’처럼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물건이 없지 않았으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모형’만큼이나 유명한 타틀린의 다른 작품 ‘레타틀린’처럼 그가 디자인한 실용적인 물건들은 대부분 시대를 너무 앞서간지라, 한 번도 산업적으로는 생산되지 못했다.
‘레타틀린’은 비행 기계다. 레타틀린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어로 ‘날다’라는 의미의 동사 ‘레타치(летать)’와 자신의 이름을 합성해서 만들었다. 레타틀린은 새의 비행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해서, 순전히 사람의 근력만으로 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타틀린에 의하면, “레타틀린 안에서 사람들은 헤엄치는 자세로 엎드려… 수영할 때처럼 팔과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그것은 공중 수영이 될 것이다. 공중 수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냥 보통 수영을 할 때의 에너지뿐이다.” 이런 레타틀린의 별칭을 왜 ‘공중 자전거’라고 했는지는 묘연하다. 하지만 레타틀린이 서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 후 날로 성능이 좋아지고 있던 대형 그리고 대중 교통수단으로서의 비행기와는 전혀 다른 발상이었음은 분명하다. 자전거처럼 개인적이면서, 근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탈 수 있는 교통수단.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타틀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나는 인간에게 비행의 느낌을 되돌려주고 싶다… 우리는 비행기의 기계적 비행으로부터 이 느낌을 빼앗겼다. 우리는 공중에서 우리 신체가 움직이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미술이론가
■ 용어설명
물질문화(culture of materials, or material culture) : 러시아 혁명이라는 대변혁이 임박한 가운데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피카소의 콜라주에서 힌트를 얻어 발전시킨 ‘물질문화’ 개념은 미술의 제작에서 재료가 물질적 성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동시에 구조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물질문화 개념은 작가의 개념도 변형한다. 어떤 물질이든 그것만의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관념적 표현을 위해 물질의 진실한 속성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정확하게 물질의 특성을 정의하고 그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질문화’ 개념과 더불어 타틀린은 “눈을 촉각의 통제 아래 두자”는 슬로건으로도 유명하다. 눈이 대변하는 환영과 관념의 세계를 거부하고 촉각이 대변하는 물질과 구축의 세계를 중시한 또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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