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딸인 제가 결혼했던 지난 1990년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여덟 남매를 길러냈던 건강한 농사꾼에게 심장마비가 일어났습니다. 첫돌도 안 지났던 아들을 품에 안고 고향으로 가던 내내 울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에서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새벽같이 집 바깥에 나가 종일 논밭을 갈다가 해 질 녘 고단한 얼굴로 돌아오셨던 모습입니다. 조금만 더 오래 곁에 남으셨다면 다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요.
배곯은 날이 흔했던 1970년대 저는 경북 고령군 외진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여덟 남매 중 늦둥이들로 태어난 저와 동생은 아버지 덕분에 굶주림을 모르고 자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 둘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하고 있던 논밭 주변에서 메뚜기를 잡거나 하면서 온종일 놀고는 했습니다. 두 딸이 배고플까 봐 걱정했던 아버지는 아직 덜 야물었던 콩을 짚불에 익혔습니다. ‘콩사리’라고 불렀던 그것을 후후 불어먹으며 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집에 돌아갈 때쯤 아버지는 지게꾼이 돼 우리 둘을 등에 짊어지고 걷고는 했습니다.
아버지 지게에 타지 않고 산길을 오갈 나이가 된 저는 소를 끌고 아버지를 따라다녔습니다. 여물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때라 점심 먹을 시간이 되면 소를 산길에 풀었습니다. 아버지가 이튿날 새벽 소 먹일 풀을 뜯고 있는 동안 저는 ‘우리 집 재산 1호’ 곁을 지켰습니다. 딸들과 가끔 수다를 떨었을 법도 했지만, 묵묵히 풀만 뜯던 아버지였습니다.
“잘 살아야 해.” 1990년 1월 제가 결혼하고 집을 떠나던 날 아버지가 뱉었던 짧은 한마디가 그래서 이렇게 선명히 기억되나 봅니다. 당시 저는 고령군을 떠나 대구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 고향에 들렀다가 대구로 돌아가던 저를 배웅하던 아버지는, 길모퉁이를 돌아 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다. 그 이듬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제가 결혼해서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입니다.
그 결혼 며칠 전, 남편과 고령군 집에 들렀습니다. 화장실에 가느라 새벽에 잠깐 바깥으로 나왔던 남편을 아버지께서 불렀던 모양입니다. 다들 잠들어 있던 그 시간에 돼지 앞다리살을 굽더니 남편더러 소주 한잔 마시자고 하셨답니다. 지금도 남편은 그때 아버지와 먹었던 돼지고기에 곁들인 소주가 너무나 맛있어서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그때 예비 사위를 앉혀 놓고 무슨 말씀을 하셨던 건지, 궁금한 티를 내지 않고 있는데 남편도 본인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눈치입니다. 자식이 잘 살길 바라는 그 마음이 말을 통하지 않고도 아직 생생해 굳이 남편에게 묻지 않으려고 합니다.
딸 손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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