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자로부터 9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확정돼 징역 2년을 살고 나온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무죄라는 주장이 총선 후 180석을 얻은 여권에서 나올 때만 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증거가 명백해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로 유죄가 확정된 사건을 재론하는 게 아무 실익이 없기에 ‘친노·친문(親盧·親文)의 대모’를 향한 립서비스 또는 여권의 고질적인 식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친여 성향 매체들이 고(故)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옥중 비망록에 검찰이 위증을 강요한 내용이 있다고 보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당 지도부가 사건의 재조사를 공식 촉구하고 나섰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전 총리는) 검찰의 강압수사, 사법농단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법무부와 검찰은 부처와 기관의 명예, 법원은 사법부의 명예를 걸고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일에 즉시 착수하길 바란다”는 훈계성 발언까지 했다. 여권 주요 정치인이 검찰의 강압 수사만 주장한 게 아니라 대법원 만장일치 판결 뒤에 검은 손이 작동했다는 만화 같은 주장을 펼친 것이다. 한만호 비망록은 이번에 새로 발견된 게 아니라 한명숙 재판 도중 구치소 압수수색에서 적발돼 검찰이 재판에 증거로 제출, 한만호가 검찰 진술을 법정에서 뒤집은 게 위증이라고 법원이 판단 내렸었다. 여권과 친여 매체가 보물처럼 여기는 한만호 비망록이 허위 내용이라고 법원이 옛날에 정리한 것이다.
한명숙은 국회의원 때 한만호로부터 달러 등이 포함된 현금과 수표 등 9억 원을 받았다. 이 중 한신건영 발행 1억 원짜리 수표를 한명숙의 여동생이 전세자금으로 사용한 게 드러났다. 또 한신건영이 부도난 직후 병원에 입원한 한만호가 돈을 좀 돌려달라고 해 한명숙 의원실 7급 여비서 김모 씨를 통해 2억 원을 되돌려받았다. 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에 대해 한명숙 측은 여비서와 한만호 사이의 거래라고 주장했고 여동생이 사용한 1억 원도 여비서가 빌려준 것이라고 했다. 오죽하면 한명숙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법원도 이 주장은 믿기 어렵다고 했을까.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아 재심 청구도 하기 힘든 상황에서 여권이 무조건 ‘한명숙 무죄’를 떠드는 이유는 뭘까. 우선, 검찰과 법원에 대한 견제책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현 정권이 개입된 적폐사건 검찰 수사 및 재판 무력화를 노린 정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유재수 전 금융위원회 국장에 대한 청와대 감찰 중단, 김경수 경남지사의 ‘드루킹’ 일당의 여론조작 사건 연루, 조국 사건 등에 대한 검찰 수사 및 공소유지에 브레이크를 걸고, 재판부를 정치적으로 겁박하는 1석2조의 효과를 노린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핵심 세력들이 무리하게 한명숙의 무죄를 주장해온 데 따른 관성이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2015년 8월 대법원 판결 직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한 총리가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임을 확신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으로 심리적 자위(自慰)설인데, 한명숙이 무죄라고 주장만 해도 ‘지지세력’에 아큐(阿Q)식 정신승리를 준다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사상 최대의 총선 압승을 거둔 여권의 첫 행보가 하필이면 한명숙 신원(伸冤)이라니 문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도 그다지 밝진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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