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1911~1965)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박제된 듯 사진 속에만 남아 있었다. 10세 때 아버지는 떠나셨고, 고등학교 때까지 꿈속에 수시로 찾아오셔서 내려다보고 계셨다. 사관학교로 간 후 다시 찾아오지 않으셨다. 끈질기게 찾아오시던 아버지가 가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은 나뉘지 않는다. 선명한 아버지는 선명해서 나뉘지 않고, 흐릿한 아버지는 흐릿해서 나눌 수가 없다.

56년 전의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아직은 기억해야 할 아버지로 남아 있는 아버지를 정리해 둬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하는 아버지는 아픈 아버지다. 그해 겨울은 추웠다. 석간수가 흘러내린 물은 멋진 고드름을 만들고, 크고 작은 돌 틈은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으로 빛났다. 겨우내 몰려다니던 낙엽들이 화석처럼 얼음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얼음이 얼어붙은 웅덩이에서 썰매를 지치는 아이는 마냥 신이 났다. 형은 아버지가 곧 세상을 떠나신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임종을 봐야 한다고 소리쳤다. 손짓하고 들어가는 형 뒤에 혓바닥을 날름거린 아이는 임종이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무섭지 않았지만, 형은 무서웠다. 연도 팽이도 만들어주지 않을 형을 생각하면 많이 무서웠다.

아버지는 벼 냄새나 고구마 냄새가 밴 큰 사랑방에 계셨다. 가끔은 마을을 지나가던 과객이나 사냥꾼이 들르기도 하고, 아버지 친구분들이 같이 노시다 동치미 국물을 마시기도 했다. 따뜻한 구들 아랫목이 좋아 맨발로 들르면 문 없는 벽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서책을 꺼내 읽어 주시기도 했다. 채 오십도 되기 전에 늙으신 아버지는 먼 친척 아저씨가 만들어준 틀니를 밤이면 빼서 등잔 아래 놓아두셨다. 틀니는 조금 무서웠지만 합죽해진 얼굴은 근엄함이 사라져 따뜻했다. 틀니를 빼놓고 글을 읽으실 때는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지면서 훨씬 구수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많은 사람이 신수 풀이한다고 아버지를 찾았다. 가난하고 바뀔 것 없는 산골 농사꾼들이 뭐 그렇게 해마다 토정비결로 행운을 점치는지 알 수 없었다. 겉장이 두꺼운 아버지의 48괘 토정비결 책은 신서(神書)였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주역처럼 괘가 그려진 책을 펴놓고 손가락을 짚어가며 읽으셨다. 사람들은 한 해 전체의 운수를 요약해 놓은 괘상(卦象)을 듣는 순간부터 눈을 반짝였고 웃음과 한숨이 교차했다. 그해 정월 아버지는 자신의 토정비결을 보시고 절망하셨다. 괘상에 “뗏장을 쓰고 토굴에 누워 있을 괘”라고 돼 있었다.

읍내 병원에 몇 개월 계시다가 싸락눈이 내리던 날, 시발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마을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려 부축을 받으며 삼촌 손수레를 타셨다. 시발택시를 구경하기 위해 아이들이 빙 둘러섰다.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고 누나와 형들은 울었다. 임종 후 삼베수의를 입고 누워계신 아버지는 쓸쓸했다. 형의 성화에 못 이겨 안방으로 들어가 절을 했다. 두 번은 해야 한다고 형이 말했지만 한 번만 했다. 설날마다 아버지께 절을 한 번만 했는데 갑자기 두 번을 하래서 어리둥절했다. 절을 한 후 이승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밥상 위에 놓여 있는 밤 한 톨을 날름 집어 들고 댓돌 아래로 내려섰다. 우리 집을 몇몇 아이가 기웃거렸고 그들 중 누군가가 나무 썰매를 훔쳐갈까 더 무서웠다. 시집간 큰누나도 머리를 풀고 눈 쌓인 30리 길을 쓰러질 듯 달려왔다. 몰려든 아이들로 왠지 우쭐했다.

떠나신 지 56년이 다 돼가는 오늘, 철없던 아이가 그리운 아버지를 소환해본다.

아들 이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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