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호(1931∼2020)

눈이 부시도록 맑고 푸르던 5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아버지는 잠든 아기처럼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한밤중 갑작스레 폐렴 증세로 응급실에 가시고, 새벽녘 중환자실로 옮긴 후 저녁 면회시간의 짧은 만남, 다음날 아침 찾아뵐 때만 해도 그렇게 서둘러 가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아버지가 떠나신 후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북으로 창을 낸 서재에서 조용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계신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러다가 문득 다시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볼 수도, 아버지를 안아볼 수도, 아니 이제는 뵐 수조차 없고 영원한 이별을 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말할 수 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왈칵 눈물이 솟고는 합니다.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아버지는 6·25전쟁 때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남다른 삶을 사셨기에 저희는 친척이 많지 않았지요.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질 때마다 저는 아버지가 만남을 신청하지 않으시는 것이 늘 궁금했지요. 어느 날, “아버지는 왜 가족들을 찾지 않으세요” 하고 여쭈었더니, “혹시라도 북쪽 형제들에게 해가 될까 찾지 않는 거야”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다른 가족들의 눈물겨운 상봉을 말없이 보고만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날따라 참 쓸쓸하게 느껴졌어요. 이념의 골이 지금보다 훨씬 깊던 시절, 장남이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동생들을 이북에 남긴 채 남한의 군인으로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사시면서도 두고 오신 가족들 생각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저는 차마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홀로 내려오신 아버지는 어머니와 저희 세 딸을 돌보기 위해 어려운 일도 참 많이 겪으셨지만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며 묵묵히 가장의 자리를 지켜나가셨지요. 신문명에 호기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컴퓨터가 일상화되지 않았던 시절, 독학으로 컴퓨터 사용법을 깨치시고는 퇴직 후 어린이와 어르신들을 가르칠 만큼 열정적이셨고, ‘하라그랜’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시면서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사이버상에서의 소통도 즐기셨습니다. 사진 찍는 일도 참 좋아하셔 블로그에 직접 찍은 사진과 글을 올리셨습니다. 수녀님인 큰언니는 아버지의 블로그 글들을 모아 ‘무서록(無序錄)’이라는 책으로 엮어 칠순 선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무서록’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던 작가 상허 이태준 선생의 수필집 제목을 빌린 것입니다. 정성스레 엮은 책을 받고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어린이들을 특별히 예뻐하셔 동네 아이들과 장난치길 좋아하셨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 사진을 찍어 공모전에도 내곤 하셨지요. 자전거를 좋아하셔 집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왕복 60㎞가 넘는 길도 거뜬히 다녀오시곤 하셨습니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시는 아버지 등 뒤에서 어머니는 “조심해요. 나이 든 양반이 애들처럼 왜 그런 운동을 좋아하시냐”면서 어린아이를 내보내듯 옷매무새며 자전거의 안전 상태를 살피곤 하셨지요.

지금 아버지를 추억하며 이 글을 쓰다 보니 어린이를 예뻐하시던 아버지 모습과 부대에서 휴가 나온 아버지에게 업혀 목말 타고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제 모습, 그리고 귀하게 태어나 할아버지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란 조카가 당신의 목말을 타고 좋아하던 모습이 중첩돼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갑니다.

2017년부터 2년 넘게 미국 생활을 하였던 맏딸 수녀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하신 듯 아버지는 딸들과 사위, 손자를 모두 만나시고 고통스러운 모습 한 번 보여주지 않은 채 그렇게 고요히 떠나가셨습니다. 코로나19로 두 달 넘게 지속됐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잠시 완화됐던 5월의 그날, 마치 예정이라도 하신 듯 말이지요.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 그날부터 장례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까지 사흘, 하늘은 또 어쩌면 그렇게 서럽도록 높고 투명하던지요. 어릴 적 가족 여행을 할 때면 저희 세 딸은 늘 뒷좌석에 앉아 재잘거리다 노래를 부르곤 했지요. 화음까지 넣어 몇 곡이고 불러 젖히면 두 분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한 곡만 더 불러 보라며 딸들의 흥을 돋워주셨지요. 푸른 하늘과 연둣빛 산들, 그리고 지천으로 핀 붉은 꽃들! 소풍 가기 참 좋은 날이지만, 세 딸은 이제 아버지를 모신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에 나서야만 했습니다. 운전석엔 아버지가 안 계시고, 세 딸은 노래도 없이 속울음으로 고요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살갑게 속삭이는 딸들의 귓속 이야기와 서로 경쟁하듯 부르는 쟁쟁한 합창을 들으시며 흐뭇하게 먼 여행길 나서셨겠지요?

돌아오던 길, 수도권 한갓진 요양원. 전염병 차단을 위한 이중창을 사이에 두고 망각의 세월을 부여잡으려 애쓰시는 어머니께 아픈 소식을 전하던 날, 어머니는 세 딸의 이름을 떠올리느라 애쓰시며 수줍은 듯 연방 손시늉을 하시더군요. 얼마 전까지도 한 방에서 같이 지내던 영원한 반려자와의 이별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엷은 소녀 미소만 지으셨지요.

푸른 제복의 충심으로 그토록 지켜내려 애쓰셨던 아버지의 ‘조국’은 오늘도 소란스럽기만 하네요. 철책 너머 화해의 장엔 폭음이 울리고 위장된 평화는 여전히 외줄타기처럼 위태롭습니다. 70년 전 평양에서 대학을 다니시던 아버지, 인민군에 징집돼 남으로 내려오다 탈출해 산으로 숨어들었고, 외딴 산골 노인의 도움으로 민간인 옷을 얻어 입고 산을 내려오셨다지요. 이후 국군으로 자원 입대, 장교로 임관해 전쟁을 치른 후 전역할 때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셨습니다.

이제 ‘치열한 지상의 전투’를 모두 끝낸 아버지,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떠난 한 청년의 넋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산천 청진으로 귀향하셔야 할 텐데, 포성이 완전히 멈출 날이 언제가 될지 아득하기만 하네요.

아버지, 그곳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계시지요? 그립던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만나시고 엄마와 저희들 지켜보고 계시지요? 무뚝뚝한 막내딸은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말 이제야 겨우 꺼내 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가족들과 함께

막내 보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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