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파리, 알제
알제리 산동네 떠돌던 소년
파리사교계서 프랑스인 강조
마흔셋 최연소 노벨상에도
허무의 심연은 동굴과 같아
두려움 떨다 운명처럼 단명
청춘들 대변한 문장만 남아
작가란 대체로 제 아픈 상처를 스스로 핥아내는 짐승 같은 생물. 그 기이한 생명체는 때로 제 안에서 자라나는 절망과 어둠을 양식으로 삼기도 한다. 카뮈는 특히 더했다. 그는 반평생 동안 그 가슴에 가난한 아프리카와 화려한 프랑스라는 두 개의 조국을 안고 있어야 했다. 아니 앓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경계 위에 선 그 남자는 그래서 긴 장대를 옆으로 들고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광대처럼 그렇게 의식의 심연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대체로 불행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카뮈는 어이없이 죽었다. 노벨상을 받은 지 3년도 못 돼서…. 하지만 짧은 생물학적 삶의 길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문학인, 비문학인을 막론하고 현전(現前)으로 사람들 앞에 불쑥불쑥 서 있곤 했다. 그가 쓴 문자들은 유전적 ‘밈’이 돼 전 세계에 그의 체취를 뿌려댔던 것이다. 그래서 때로 예술가에게는 단명도 축복이다. 삶이 애달프게 끝날수록 못다한 나머지 삶을, 아니 그 이상을 불특정의 사람이 모여서 채워주려 안달하기 때문이다.
세라비(C’est La vie), 그것이 인생이다. 흔히들 예술가의 파란만장한 짧은 생애를 일러 불꽃처럼 살다 갔다고들 덕담 삼아 표현하지만 작가 카뮈의 삶은 불꽃도 있었지만 대체로 젖은 짚단 같은 삶이었다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영광과 굴욕 사이, 갈채와 비난 사이의 세월 세라비. 지나고 보니 그것이 인생이었다고, 그는 죽기 전 한 글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셨다. ‘섬’을 쓴 작가이자 철학자이고 당대의 지성이었던 장 그르니에를 고교 시절 만났던 것. 그는 스승이 ‘지중해의 영감’에서 보여준 그 물빛의 아름답고 투명한 문장 세계에서 영감을 받았고 결국 그 뒤를 따라 작가의 길로 긴 여정을 나섰던 것이다.
훗날 스승은 재능 많은 제자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나는 가고 그는 남았어야 했다’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카뮈는 인생의 우연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불안 속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았는데 세계의 논리는 나의 논리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의 사적 체험을 하게 되고 이를 문학이라는 통로를 통해 공적으로 펼쳐 나갔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그 한 번에 찌르고 들어오는 느낌의 단검과 같은 문장은 어쩌면 세계 문학 사상 가장 강렬한 첫 문장의 인상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이 첫 문장에서 이미 그는 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예고했고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대의 문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러한 그의 문학에 ‘부조리 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어머니라는 위대하고 예찬받아 마땅한 모성을 그는 나와 다른 하나의 개체일 뿐이라고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이 반인륜적 문장은 부조리 문학의 선언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기성의 질서가 만든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했던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열광케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의 첫 문장에도 매료됐지만 마지막 문장,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에 더 많이 열광한다. 이 허무의 몸짓 같은 마지막 문장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청춘의 좌절감을 대변한 것이 됐다. 카뮈라는 열병을 앓은 이후 전통 소설 속에서는 더 이상 도덕적인 히어로로서의 주인공이 서있기 어렵게 된다. 이른바 누보로망의 문학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알베르 카뮈
스승 그르니에 영향받아
수채화같은 작품도 남겨
흔히들 절망의 문학가, 어둠의 철학자, 노동자들의 극작가로 알려진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 11.07∼1960. 01.04·사진). 볼테르 이래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계와 프랑스계 부모의 피를 이어받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몬도비에서 태어났다. 산동네 벨쿠르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이후 파리에서 문학 활동을 했던 그에게는 호모비아토르(HomoViator·여행하는 인간)의 DNA가 있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1차세계대전 마른 전투에서 사망했고 어머니는 청각장애자였는데 그는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극빈자 거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교 시절 철학교사이자 작가였던 장 그르니에를 만나면서 그의 문학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며 ‘콩바(Combar)’라는 기관지를 펴내기도 했고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탈퇴하는 등 문학적으로도 좌파와 저항문학의 기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 문장 세계는 극과 극을 보였다. ‘지중해의 영감’을 쓴 스승의 문장을 닮아 ‘결혼’ ‘티파사의 여름’처럼 수채화같이 아름다운 글들을 남겼는가 하면 ‘이방인’ ‘전락’ ‘페스트’ 같은 무거운 주제에 강렬하고 도발적인 글을 많이 쓰기도 했다. 1942년 ‘이방인’을 펴내면서 폭발적 인기를 얻었고 1945년의 희곡 ‘칼리굴라’는 부조리 연극의 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1934년에 파리의 부유층 집 딸인 시몬 이에와 결혼했으나 2년 만에 결별하고 1940년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와 재혼해 쌍둥이를 낳았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결혼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인 데다 여러 차례의 불륜을 저질러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매력적인 외모에 문학적·철학적·정치적으로 늘 휴머니즘을 견지해 약자의 편에 서려했기에 그는 열광과 비난의 가운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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