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갑(1932∼2000)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장마철이면 고생만 하다 가신 아버지 생각이 더 절실하게 나곤 한다. 시골의 작은 초가집에서 남의 땅에 농사를 지어 세를 내며 우리 5남매를 키워내신 나의 부모님!

늘 농사일에 시달리시는 부모님을 보고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을 도와드리곤 했다. 시장이 산모퉁이 도로를 따라 나 있어서 새벽 별을 보며 시장으로 갈 때 아버지께서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어머니와 나는 뒤에서 밀어 산모퉁이 꼭대기까지 갔다가 나 홀로 어두운 길을 되돌아 집으로 와 동생들 밥을 해 먹이고 학교로 가곤 했다.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집에서 멍석을 만들며 노래를 부르셨다. 일이 없을 때는 우리 5남매에게 동요를 불러주고 가르쳐 주시곤 했다. 항상 노래와 함께 생활하시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시간만 나면 책을 읽고 공부를 하셨으며 힘들어하는 나를 달래가며 칭찬도 하시고 숙제도 하게 해 주셨다.

그러나 형편은 늘 어려웠고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내게 친구분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하라고 하셨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는 마음에 밤마다 몰래 울고 아침에는 멀쩡한 듯한 모습으로 학교에 갔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고 의논 끝에 “너희 5남매 모두 고등학교만 보내 줄 테니 대학은 본인들이 가고 싶으면 알아서들 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조건은 인문계는 도저히 보낼 수 없고 실업계를 가라고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니까 아버지께서는 마음이 걸리셨는지 전문대라도 가라고 하시며 설마 밥 굶겠냐고 하셨다.

취직하던 해 첫 월급으로 아버지께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시라고 큰 건전지가 들어가는 ‘셰이크 라디오’를 사드렸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늘 밭에 들고 다니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47세 때 노래 부르시는 것을 녹음해드렸는데 지금도 그 테이프로 아버지 목소리를 듣곤 한다. 아버지의 그때 모습이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나는 8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동생이 대학을 마치게 하고 결혼한 후 농협에 입사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을 날 듯이 기뻐하셨고, 고생만 시킨 맏딸이라면서 항상 미안해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사시고 행복하게 가정을 이끌어가던 아버지께서는 67세 되던 해 급성 위암에 걸리셨고, 같은 날 어머니는 나무에 걸린 고양이를 구해주려다가 떨어져 척추뼈가 골절됐다. 우리 형제들은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렇게 버티시던 아버지는 2000년 68세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돌아가시기 3일 전 유언을 남기셨는데 “아비가 너를 너무 고생시켰고, 대학을 못 보내준 것이 평생의 한이다. 미안하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래서 “아버지, 다른 집 아이들은 부모님이 식모로 보낸 집도 많은데 이렇게 함께 살고 고등학교까지 보내 주셔서 잘 살고 있잖아요. 내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에 꼭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자 아버지 얼굴이 환해지며 꼭 가서 공부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44세가 되던 2003년 방송통신대에 입학해 원하는 두 개의 학과를 7년 동안 다녔고 무사히 졸업해 지금 환갑의 나이인데도 직장을 잘 다니고 있다. 나의 아버지! 나의 등대, 나의 인생의 나침반이 돼주신 분!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자신에게 부끄럽게 살지 말고, 결혼해서는 자식에게 부끄럽게 살지 말라던 아버지 말씀 명심하며 또 다른 아이들의 등대가 돼주면서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 번 해본다. 나의 소중한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쁜 딸 김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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