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환(1951∼2002)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여의도 귀신바위를 찾았다. 중앙대부속고등학교 주최 학생의날 기념 음악콩쿠르대회 성악 부문에 학교 대표로 출전하게 돼 있어 연습할 장소로는 그곳이 딱이었다.

그날따라 보름달이 무척 밝았다. 그때였다. 저만치서 당시 애창하던 배성의 ‘망향’을 부르면서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전 같은 반이 된 단짝 익환이였다. 그의 눈동자는 유난히 반짝이고 총명하게 느껴졌다. 타오르는 듯한 눈빛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이 외로워 보였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와 나는 전생의 형제처럼 닮은 점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폐결핵 말기셨다. 폐결핵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내 처지와 비슷했다. 아버지가 폐결핵 환자라는 이유로 동네 친구들은 그를 피했다. 우리는 몇 십년지기처럼 금세 친해졌다. 어느 날 우리는 약속을 했다. 내가 먼저 제안했다. 포도주에 피를 타서 같이 마시자고.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 포도주에 섞었다. 서로 한쪽 팔을 걸고 사나이 약속을 했다.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꼭 성공해서 환갑이 되는 해 정월 대보름날 밤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문 사설을 한 번 읽고 그대로 기억해내는 천재였고, 나는 음악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그는 대학과 ROTC를 수석으로 졸업해 중위로 제대하더니 당시 최고의 직장인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그 후로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이 되면 여의도 귀신바위를 찾아가거나 바라보면서 익환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리고 환갑날 귀신바위 앞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꼭 만나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내가 막 가게 문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승호야 뭐하니?” 고개를 돌려보니 이게 누구인가. 24년 만에 보는 익환이였다. 그는 드라이브를 하자더니 날 미사리 어느 카페로 데리고 갔다. 그는 놀랍게도 우리가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나를 생각했고 돌아올 환갑이 되는 해 내게 큰 선물을 하겠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정신없이 가게 일을 막 끝마치고 있을 때였다. 그날따라 전화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익환이였다. “승호야! 그놈의 출세가 뭔지 그걸 좇아가다 친구도 건강도 다 잃어버린 것 같아. 너 하고도 자주 만났어야 했는데 이기적인 내 성격 때문에 너한테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너에게 소홀했던 게 너무 후회가 돼. 너한테 한 약속대로 환갑날 큰 선물도 줘야 하고 그날처럼 포도주도 한잔해야 하는데…. 너에게 꼭 할 말이 있는데 내일 좀 와줄래? 나 췌장암 말기야. 내일 꼭 와 주는 거지? 기다리고 있을게.” 그는 몇 번씩 꼭 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꽤 멀었다. 거의 혼자 슈퍼를 운영하는 나로서는 간다고 약속은 했지만, 선뜻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췌장암이 그렇게 빨리 증세가 악화하는 병이란 생각을 못 한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씻지 못할 실수가 돼 버렸다. ‘내일 가야지’ 하는 사이 하루 이틀이 지났는데 전화가 왔다. 익환이인 줄 알고 반갑게 받았는데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익환이가 나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고 걱정하면서 이 세상을 떴다고 했다. 우리가 굳게 약속한 환갑을 10년 남긴 만 50세였다. 난 지금도 그가 나에게 하려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꿈속에서라도 듣고 싶을 만큼 너무 궁금하고 그가 그립다.

친구 김승호


‘그립습니다·자랑합니다·미안합니다’ 사연 이렇게 보내주세요

△ 이메일 : phs2000@munhwa.com
△ 카카오톡 : 채팅창에서 ‘돋보기’ 클릭 후 ‘문화일보’를 검색. 이후 ‘채팅하기’를 눌러 사연 전송
△ QR코드 : 독자면 QR코드를 찍으면 문화일보 카카오톡 창으로 자동 연결
△ 전화 : 02-3701-5261


▨ 사연 채택 시 사은품 드립니다.

채택된 사연에 대해서는 소정(원고지 1매당 5000원 상당)의 사은품(스타벅스 기프티콘)을 휴대전화로 전송해 드립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