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국가체제 유지의 기둥 역할을 해오던 제반 가치관, 곧 국가 정체성·역사관·보훈관 등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공황에 빠진 것 같다. 국가 정체성은 개인이 국가와 민족에 대해 소속감을 갖고 국민의 일원으로서 연대감을 갖게 하는 핵심 가치다. 많은 국민은, 현 정부가 평등·공정·정의를 입에 달고 있어 기대가 컸다. 하지만 기대가 망상임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우선, 좌파 단체와 지식인들은 대한민국 정체성에 관련된 역사 자료를 왜곡해 끊임없는 쟁점화로 소모적 갈등과 논쟁을 벌여 왔다. 예컨대, 건국일이 언제인지,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은 어떤 관계인지, 1948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해방된 것인지, 광복을 달성한 것인지를 놓고 벌인 논쟁이 대표적이다. 그들 주장처럼 대한민국은 비밀리에 비정상적으로 건국된 나라가 아니다.
둘째, 북한의 6·25 기습 남침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일제강점기 때 간도특설대 복무를 빌미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 국립서울현충원 안장까지 반대하며 모욕했다. 한 라디오 진행자는 6·25 때 우리 민족인 북한에 총을 쏜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은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국가의 외면 속에 치른 호국 영웅 장례식과, 성추행 혐의 피의자로서 생을 마감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셋째, 국가보훈처는 한때 광복군에 몸담았다가 해방 후 월북해 장관급으로 일하며 김일성과 함께 6·25 남침을 주도했던 김원봉의 서훈(敍勳)을 검토하다가 비판받자 보류했다. 또, 국가보훈처장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55주기 추모식에서 초대 대통령 아닌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박사’로 호칭하며 자유민주국가 수립과 한·미 동맹 체결 공적마저 도외시, 폄훼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사상전이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모순적 언어와 자기 기망(欺罔)이다. 그동안 참석하지 않던 6·25전쟁 기념식에서 올해는 ‘조국(祖國)은 단 한 순간도 호국 영웅들을 잊지 않았다…. 정부는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하지만 정작 6·25전쟁 영웅의 빈소에는 조문이나 애도 성명 없이 면피성 조화(弔花)로 대신했다. 한 병사의 죽음 앞에서도 경건하게 추모하는 미국 대통령들과 판이한 모습에서, 마치 애국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은 자신을 의주까지 수행한 공로로 이항복 외 수십 명의 내시, 이마(理馬), 복례(僕隷·종)까지 포함한 호성공신 86명을 봉했다. 반면, 7년 동안 목숨 걸고 싸운 선무공신은 18명에 불과했고, 의병장은 한 사람도 끼이지 못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처럼 위국(爲國)헌신한 국가유공자를 외면하고 홀대하는 과거 풍토는,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의 전사상자 치료와 보상, 6·25 국군포로 수수방관 등의 사례에서 현재진행형임이 확인된다. 국가보훈처가 제시한 ‘국가를 위한 헌신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나라’라는 비전이, 국가를 위한 헌신은 망각하고 보답은 외면하는 나라로 읽히는 까닭이다.
최근 원로 진보학자 최장집 교수는 문 정권의 ‘빠’세력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의미심장한 비판을 했다. 몰염치·몰상식·비이성적 행위가 곧 현 정권에 부메랑이 될 것임을 경고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존망은 이념과 정파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생사와 직결된 모두의 문제다. 이제 분열의 정치와 역사 왜곡, 그리고 고무줄 보훈을 바로잡고,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가장된(pseudo) 평화 주술(呪術)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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