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펠리페 6세 국왕에 서한
망명지서 태어나 다시 국외로
사우디 고속철 관련 뇌물 의혹
잇단 스캔들 민주화 군주 퇴색
신뢰 추락 왕실존폐 논란 커져
‘독재 청산 영웅’에서 ‘횡령 범죄자’로 추락하면서 양위까지 했던 후안 카를로스 1세(82·사진) 전 스페인 국왕이 결국 고국을 떠나겠다고 3일 선언했다. 사실상 ‘추방’이며 ‘망명’ 선언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왕실 존폐 논란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엘파이스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스페인 왕실은 이날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아들인 펠리페 6세 현 국왕에게 스페인을 떠나 있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왕실이 공개한 서한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과거의 어떤 사건들로 인해 시작된 국민의 반발에 직면해서 이 나라를 떠나려고 한다”고 밝혔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1년 전 나는 더 이상 공식적 활동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게 스페인과 국왕인 너(아들)를 위한 최선의 봉사라고 여겼기 때문”이라며 “이제는 그동안 심사숙고했던 국외 이주 결정을 실천하려고 한다”고 썼다. 엘파이스는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이미 스페인을 떠났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행선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을 집권하고 있던 1938년 망명지인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생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인생 말년을 또다시 국외에서 보내게 된 셈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를 무너뜨린 것은 바로 부패 스캔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건네받아 이를 스위스 계좌를 통해 돈세탁한 혐의로 스위스 및 스페인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사우디의 메카-메디나 고속철 사업권을 따낸 스페인 컨소시엄이 사우디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대금 지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이를 막후 중재하는 과정에서 1억 달러(1200억 원 상당)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이 자금을 내연관계인 덴마크계 독일인 여성사업가 코리나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조세회피처에 은닉한 뒤 세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아들인 펠리페 6세 현 국왕은 아버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미래의 개인 유산을 포기했고,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지급되던 연봉도 박탈했다. 하지만 스위스 검찰이 해외계좌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고, 스페인 대법원이 추가 수사를 명령하면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출국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수호자’였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몰락은 스페인 왕실에도 적잖은 부담이 되고 있다. 프랑코 사후 1975년 국왕으로 지명됐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의 후계자인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를 압박해 자진 사퇴하게 하는 등 민주화 개혁을 시도한 군주로 꼽혔는데, 이번 부패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가 무너진 것. 특히 1981년 군사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스페인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및 유럽연합(EU) 가입에 큰 역할을 하면서 2007년 ‘가장 존경하는 스페인 인물’ 1위를 차지했던 후안 카를로스 1세에 대한 국민의 배신감은 상당하다. 여기에 차녀 크리스티나 공주의 사기·횡령 의혹 등이 겹치면서 현재 왕실 이미지는 바닥까지 추락한 상태다. 최근 방송국 라섹스타 등이 실시한 스페인 정부기관 평판 조사 결과에서도 왕실과 펠리페 6세 국왕은 10점 만점에 각각 4.3점과 4.8점을 기록하면서 최하위 평점을 받았다.
박준우 기자 jwrepublic@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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