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탐사 25번중 남극行 5번
주요 임무는 심해 활화산 연구
탐사땐 꼭 노자해설서 챙겨가
2019년 새 ‘맨틀’ 포착 성과
신종 생명체 ‘아라오나’ 발견
바닷속 생태계에 절로 숙연
“헤아려 보니 25년 동안 스물다섯 번이나 해양탐사를 나갔네요. ‘내 인생에 무슨 역마살이 끼었나…’ 싶다가도 어릴 때 품은 바다를 향한 동경을 생각하면 하늘이 예비한 운명대로 자연스럽게 흘러온 것 같습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의 박숭현(52) 책임연구원은 이름 앞에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항해자’ 혹은 ‘탐험가’로 불릴 때 남몰래 뒤돌아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고 했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보면 이런 마음이 금세 이해된다. 박 책임연구원은 책상머리에 앉아 자료와 씨름할 때보다 거친 파도가 물결치는 현장에 있을 때 실존의 생생한 감각을 느낀다. 현장을 떠나 있을 때도 바다만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25번의 해양탐사 가운데 ‘극한의 땅’이라 불리는 남극을 탐험한 것만 다섯 차례다.
최근 출간된 ‘남극이 부른다’(동아시아)는 탐험가를 소망하는 과학자의 해저탐사기다. 남극이라는 미지의 공간에서 길어 올린 성과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애 첫 책을 세상에 내놓고 떨리는 마음으로 독자의 반응을 기다리는 저자를 지난 5일 문화일보에서 만났다.
“지구는 우리가 모여 사는 집이고, 인간은 지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잖아요. 무궁무진한 자원의 보고(寶庫)인 남극을 탐험하는 건 지구의 진화 과정을 살피는 일입니다.” 박 책임연구원은 인류의 터전을 잘 가꾸기 위해 남극 탐사에 매달리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새로운 생명체가 계속 발견되는 남극 생태계를 보호하지 않으면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저자의 주된 연구 분야는 해령(海嶺)이다. 해령은 수천 m 깊이의 심해에 잠겨 있는 활화산을 뜻한다. 놀라운 것은 여느 바다와 마찬가지로 남극 아래에도 해령이 있다는 사실이다. 차가운 얼음으로 뒤덮인 남극 대륙이 저 깊은 곳에 뜨거운 불구덩이를 안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딛고 선 땅처럼 해령의 내부에도 뜨거운 ‘맨틀’이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맨틀의 움직임으로 대륙의 위치가 바뀌고 바다의 넓이도 변하죠.”
2019년 남극 대륙과 뉴질랜드 사이에 놓인 새로운 유형의 맨틀을 포착한 것은 박 책임연구원과 대원들이 함께 이룩한 가장 빛나는 결실이다. 이 연구 성과는 세계 유수의 저널 ‘네이처 지구과학’에 실렸다. 남극 해령에서 열수(熱水) 분출구와 게의 일종인 신종 생명체 ‘아라오나’를 발견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열수는 맨틀에서 녹아내린 용암이 해수와 만나 끓어오른 물이에요. 이 열수가 내뿜는 에너지에 의존해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것이죠. 한 줄기 빛도 가닿지 않는 심해의 한복판에 형성된 생태계와 마주하면 저절로 숙연해져요.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함부로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해양과학자이지만 박 책임연구원은 인문학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남다르다. 과학이든 탐험이든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고, 인간의 철학과 사상이 응축된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 발견한 남극의 열수 분출구에 ‘무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학창 시절 김승옥 선생님의 ‘무진기행’을 탐독했어요.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것 같은 분출구의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 소설을 떠올렸지요.”
탐사를 나갈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겨가는 책도 여느 과학자의 명저가 아니라 중국 사상가 노자에 대한 해설서 ‘노자 왕필주’다. “주어진 예산과 기한 내에 계획했던 모든 것을 얻기란 불가능해요. 툭하면 거센 풍랑이 일고, 때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자연은 언제나 변덕스러운 존재니까요. ‘무위(無爲)’를 강조한 노자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면서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죠.”
가끔 불안과 공포가 짓눌러도 신비한 ‘부적’과도 같은 책이 곁에 있기에 박 책임연구원은 오늘도 남극으로 뱃머리를 향할 그날을 머릿속에 그린다. 그가 대원들을 이끌고 탐험을 떠날 때마다, 인류의 발견을 기다리는 미지의 공간은 한 뼘씩 줄어들 것이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