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들에 꽃 피는 봄이건만 시절은 영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 때는 1950년 4월,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김 씨의 환갑을 맞아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온다. 세 딸과 두 며느리, 고모와 집안일을 봐주는 할머니까지 아홉 여인은 밤늦도록 수다를 떤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숨긴 채 가만히 얘기를 듣던 김 씨가 시끌벅적한 잔치 대신 꽃놀이를 가자고 제안한다. “요맘때 봄에는 차려입고 나가 꽃도 보고 노래도 하는 기다. 1년에 딱 하루, 화전놀이.”

국립극단의 70주년 기념작 ‘화전가’(사진)는 6·25전쟁 발발 전 경북 안동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굴곡 많은 여인들의 삶을 그린다. ‘1945’ ‘3월의 눈’ 등으로 유명한 배삼식 작가가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며 연출은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맡았다. 예수정·전국향·김정은 등의 배우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연기로 아름다운 앙상블을 이룬다.

‘화전가’의 서사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아들도 있고,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남편도 있다. 하지만 이들 사내는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여인들의 대사를 통해 간간이 스쳐 지나가듯 묘사될 뿐이다. 이처럼 작가가 남성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후경(後景)으로 밀어 넣은 이유는 명백하다. 광복의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반도의 이념 투쟁은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나라를 구하느라 이리저리 활개 치고 다닌’ 사내를 가족으로 둔 여인들의 목소리를 사려 깊은 태도로 경청한다. 극의 긴장감이 한껏 고조될 무렵 작가는 큰딸의 입을 빌려 가족의 안위보다 대의명분에 집착했던 그 시절 남정네들을 향한 애증 섞인 한(恨)을 표출하기도 한다. “우리가 무슨 죄고? 내가 죽든지 말든지 38선까지 올라가 남편 귓방맹이를 올리뿔끼다.”

이러한 ‘생략’과 ‘절제’는 인물 구성뿐 아니라 극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작법이다. ‘화전가’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관객들이 당연히 무대에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어떤 대목을 생략하고 건너뛴다. 이 선택은, 행복과 불행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스스로 불운하다고 절망해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임을 숙고하게 한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라는 서사 구성의 근본적인 질문을 끈질기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이 작품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여준 사례로 남을 것 같다.

비통한 아픔으로 가득하지만, 작가는 이 드라마가 신파로 흐르지 않도록 넉넉한 해학과 유머를 곳곳에 심어놓았다. 인물들이 미제(美製) 초콜릿과 커피를 낯설고 신기해하는 장면이 나올 때는 객석에도 모처럼 ‘까르르’ 폭소가 터진다. 힘겹지만 끝내 삶을 긍정하는 건강한 낙관주의 덕분에 관객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이렇게 믿을 수 있다. 사무치는 슬픔이 있어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어도 가끔은 술 한잔 걸치고 꽃놀이를 떠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 공연은 23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나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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