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시장이 안정되고 있고, 집값 상승세도 진정되는 분위기….”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직후 내놓은 발언이다. 잠시 귀를 의심했다. 시장이 안정되고 집값 상승세가 진정된다는 저 말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 대통령의 설명은 없었다. ‘전 국민이 접하는 부동산 뉴스와 각종 관련 지표들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나?’ ‘구중궁궐(九重宮闕)’ ‘인(人)의 장막’에 막혀 국민의 목소리를 전혀 접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란 의심마저 들었다.
문 대통령의 발언 시점보다 한두 시간 앞서 국토교통부는 별도의 보도 참고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임대차 3법(전월세 신고제·계약갱신청구제·전월세 상한제) 도입으로 인해 전월세 공급이 급감하거나 가격이 폭등할 가능성은 낮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자료는 임대차 3법 도입 직후인 지난주 한국감정원이 내놓은 전셋값 상승 지표를 두고 “임대차 3법 도입 효과가 아니다”라고 부정했다. 심지어 “실제 제도 도입으로 인한 효과는 임대차 3법이 시행된 후 1개월이 지나는 시점부터 전셋값 통계에 반영돼 점차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눈을 의심했다. 정부가 1개월 뒤 시장 안정을 약속한 것이다. 대통령의 “부동산 시장 안정” 발언을 지원사격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도가 지나치다. 전례 없는 가격통제 정책인 임대차 3법을 두둔하기 위해 정부가 객관적 수치를 모른 체하는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앞서 국내 주요 5대 시중은행은 비수기인 7월에만 이례적으로 전세자금대출이 2조 원 넘게 불어났다고 밝혔다. 이 증가 폭은 전세대출 관련 집계가 시작된 2016년 이후 가장 큰 수준이다. 이 같은 전세대출의 증가는 외부요인으로 인해 단기간 전셋값이 그만큼 올랐다는 것을 뜻한다. 정부의 임대차 3법 도입 소식에 놀란 임대인들이 일제히 가격을 올렸다. 임대차 시장은 매매 시장과 달리 ‘투기·거품’ 수요가 없다. 철저히 수요·공급으로 움직이는 시장이다. 전세공급량이 수요보다 많으면 가격은 내려가고, 그 반대면 오른다. 정부가 매번 핑계 대는 투기수요 때문이란 변명은 임대차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현 정부의 지나친 자기확신이 국민을 상대로 내기를 건 것이라 볼 수 있다. 지표와는 정반대로 한 달 뒤 부동산 시장을 전망하는 정부의 무모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인지심리학에선 자기확신이 강해 주어진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경향을 ‘정박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하는데,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에게서 이런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결정 앞에서 이미 주어진 기준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시장 불안이 투기세력 때문이라는 잘못된 기준을 바꾸려 하지 않고, 객관적인 증거 등을 무시하는 정박의 오류에 빠진 것으로밖엔 해석할 수 없다. 자기확신이 지나쳐 시장 상황을 외면하고 밀어붙인 가격통제 정책이 한 달 뒤 시장 안정화를 가져온다는 확신은 종교적 맹신에 가깝다. 국토부 관료들이 항변하는 대로 이념에 치우친 집권여당의 억지를 이기지 못해 규제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최소한 저런 허세 섞인 자료를 낼 게 아니라 그냥 가만 있는 게 낫다. 차라리 부동산 가격 안정에 대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더 양심적으로 보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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