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뢰즈 철학 전공자로 지난 몇 년간 인공지능(AI),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철학과 과학의 통합 작업을 해온 철학자 김재인이 감염병이 몰고 온 뉴노멀 시대, 새로운 철학의 등장을 탐색한다. 들뢰즈 전공자답게 탐색 과정에 들뢰즈, 과타리, 다시 홉스로 거슬러 올라가며 근대 이후 철학자들을 사유의 매개로 초대하고, 과학과 철학의 통합 작업자답게 과학과 인문의 통합을 새로운 철학의 전제로 이야기한다. 최근 들어 현실과 떨어진 ‘학문’보다 발붙인 이곳 ‘현실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온 저자로서 뉴노멀은 지나칠 수 없는 주제다.
책의 출발점은 코로나 혁명이다. 이때 혁명은 한 체제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다른 체제로 급격히 변하는 사건을 말한다. 많은 이가 말하듯 우리는 이제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가시적 흐름뿐 아니라 우리를 지탱해온 개념·가치·사상 등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저자는 이 같은 뉴노멀은 코로나가 결정타이긴 하지만 감염병 대유행과 함께 AI와 기후변화라는 3개 조건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같은 틀 아래 저자는 개인, 인권부터 공동체, 영토, 정부, 공부와 배움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돌아본다. 하지만 주제는 다양해도 논거는 같다. 우리 삶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모든 것이 서구 근대화의 산물이라는 진단이다. 책은 이들 근대적 가치와 제도들이 등장한 당시 상황과 맥락을 돌아보고, 기존 서구근대의 틀로는 뉴노멀을 살아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근대적 정부는 거버넌스로 전환돼야 하고, 문·이과 틀은 문·이과에 예술까지 통합한 새로운 학문체계 뉴리버럴아츠로 전환돼야 한다고 제안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뉴노멀 시대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 방역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듯 한국 특유의 열정과 에너지가 새로운 가능성을 일궈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낙관의 근거는 우리는 줄곧 서구가 만든 근대 모델을 열심히 따라갔지만, 코로나로 세계는 이제 ‘선례’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고, 이제 한국이 가능성의 키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저자는 빼어난 문화적 인프라인 한글이 소셜미디어와 만나 지적·문화적 폭발을 만들고 있다며 한국 페이스북에는 논객들이 온갖 주제를 놓고 자기주장을 입증·발전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내 편, 네 편 갈려 확증편향을 증폭시킨다고 비판받는 한국의 SNS를 저자는 매일 엄청난 학습이 이뤄지는, 유례없이 에너지가 집중되는 곳으로 봤다. 이처럼 빠르고 역동적인 한국이라면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실험해 세계에 보편적 표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가진 숱한 문제를 괄호에 집어넣긴 했지만 그에 따르면 K-철학의 탄생이다. 224쪽, 1만50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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