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 음반·책 성공시킨 박진영
가수로 데뷔 프로듀서도 성공
배우·작가 등 끝없는 도전
파격 의상에 권위·구속 거부
인성·성실성 최고의 가치 여겨
밥은 유기농… 물은 해양심층수
집착에 가까운 자기관리 유명
가수이자 JYP엔터테인먼트의 수장 박진영을 보고 있으면 좀 다른 ‘부류’라는 생각이 든다. 실력이 빼어난 가수는 얼마든지 있다. K-팝 신드롬을 타고 선구적인 사업 감각을 보여준 제작자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를 동시에, 그것도 오랫동안 잘하는 사람은 박진영밖에 없는 것 같다. 누구보다 ‘날라리’ 같은 대중예술인이지만 그게 진정성과 땀,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박진영이 ‘본업’인 가수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 12일 제자 선미와 함께 신곡 ‘웬 위 디스코(When We Disco)’를 발표했다. 반응이 뜨겁다. 그리고 책도 냈다. 이제 그의 이름 앞에는 가수, 댄서, 작곡가, 프로듀서, CEO, 심사위원도 모자라 작가라는 수식어까지 붙게 됐다.

다양한 장르가 혼재했던 1990년대 음악 시장에서도 박진영의 등장은 유별났다. 그가 MBC 예능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까만 피부, 이국적 외모, ‘연세대 지질학과 4년’이라는 이름 자막…. 시청자들은 처음엔 박진영의 독특한 외모에 주목했다. 다음엔 흐느적거리면서도 강렬한 댄스 동작에 놀랐다. 그리고 그가 방한한 톰 크루즈를 유창한 영어로 통역하는 모습에서 눈을 크게 떴다. ‘날라리’ 이미지와 ‘지적’ 이미지의 기막힌 조화. ‘연대생 댄스 가수’는 1994년 ‘날 떠나지마’로 음악 프로그램 1위에 오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이후로도 박진영의 행보는 평범하지 않았다. 속옷이 훤히 보이는 비닐 바지로 생방송 관계자들을 아연실색하게 했고, 누드 화보로 무난함을 거부했다. 2003년 청와대에 초청됐을 때는 망사로 된 셔츠를 입어 입방아에 올랐다. 박진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권위와 구속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타고난 ‘딴따라’였다.
어려서 사고뭉치였던 박진영이 음악에 눈을 뜬 건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직장을 따라 잠시 미국 LA에 살 때였다. 우연히 TV로 본 마이클 잭슨은 그의 평생의 우상이 됐다. 2009년 잭슨이 사망하자 그는 블로그에 추모글을 올렸다. “마이클 잭슨의 음반이 내게 음악의 정의가 됐고, 내 음악의 절반 이상은 바로 그”라며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가슴에서 시작해서 머리로 완성하라
가수로서 성공을 맛본 박진영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1997년 JYP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하고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나섰다. 지금 말하는 소위 1세대 아이돌이 출현한 바로 그때다. 당시 JYP 소속 아이돌은 god였다.
이후 박진영은 내놓는 그룹마다 승승장구했다. 가수 별, 박지윤, 비, 2AM, 2PM, 신드롬을 낳았던 원더걸스까지. JYP 브랜드를 팬에게 각인시켰다. JYP는 연습생을 선발할 때 성실성과 인성을 먼저 본다. 박진영 역시 근면, 성실함을 몸소 실천한다. 그를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지인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박진영이 미국에 머물면서 원격으로 원더걸스 ‘텔미’의 안무를 시범 보인 영상은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정력적인 리더인지를 보여준다. 박진영의 친구이자 오랜 파트너인 정욱 JYP 대표는 “박진영이 미국에서 노래를 만들어 전화로 불러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는 JYP의 캐치 프레이즈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가슴에서 시작해서 머리로 완성하라.” 모티브가 있을 때 작업하라는 것, 창작과정에서는 게을러지지 말라는 뜻이다.
◇3번의 실패
물론 실패도 있었다. 박진영이 그토록 원했던 미국시장 진출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2003년부터 5년간 줄기차게 미국시장을 노크했으나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세계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현지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비가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원더걸스가 ‘노바디’로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 ‘핫 100’에 76위로 진입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연기 도전도 불발에 그쳤다. 박진영은 2012년 영화 ‘500만불의 사나이’를 통해 배우 도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500만불의 사나이’는 개봉 첫날 1만5000여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스무 살에 만난 첫사랑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것도 실패라면 실패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진영이 미국에서 좌절을 맛본 시기와 겹치는데 그는 이로 인해 ‘삶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같은 종교적, 근원적 문제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밝혔다.
◇J-Ways
박진영은 공식 석상에서 늘 “나는 영원한 딴따라이고, 60세에도 댄스가수를 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이를 위해 박진영은 자신의 몸부터 철저히 관리한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지독할 정도다. 알레르기성 비염과 아토피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유기농 식단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사옥을 강남구 청담동에서 강동구 성내동으로 옮긴 이후 아예 ‘집밥(JYP BOB)’이라는 유기농 구내식당을 만들었다. 물은 해양심층수를 마시고 저녁은 간헐적으로 단식한다. 운동은 스트레칭에서 유산소 운동 순으로 하루 평균 2시간 정도 한다. 깐깐한 시간 관리, 박진영 롱런의 비결은 여기에 있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지켜온 ‘J-웨이즈(Ways)’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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