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 ‘무제’, 1967.
마크 로스코, ‘무제’, 1967.

■ 조주연의 현대미술 속으로 - ⑫ 현대 ‘구성 미술’ 의 역사

몬드리안 ‘물질적 평면 인정하면서도 제압’하는 기하학적 추상… 선을 해방시킨 회화적 추상

표면 질감 배제한 색면 창조로 색채의 자율성 극대화… 표면과 합체하면서도 표면 압도하는 착색 추상


미술의 역사는 유구하다. 1879년에 발견된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뒤이어 1940년에 발견된 라스코 동굴 벽화까지만 해도 최장 2만 년 이내에 머물렀던 미술의 역사가 쇼베 동굴에 대한 신기술 측정으로 최소 3만 년 전으로 더 길어지더니 이후 계속된 선사 미술의 발견을 통해 최근에는 더 늘어났다. 동굴 벽화로만 치면 스페인의 카스티요 동굴의 경우 기원전 4만8000년 무렵에 그려졌다고 하므로 미술의 역사는 약 5만 년이 될 테고, 암석 위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그려 넣었던 7만3000년 전의 흔적이 나왔다는 남아프카공화국의 블롬보스 동굴까지 치면 미술의 역사는 장장 7만 년이 훌쩍 넘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길든지 간에 이 기나긴 미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배우게 되는 것은 미술의 기본 개념과 원리다. 앙드레 바쟁은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1945)에서 미술은 “존재의 육체적 외형을 고정시켜… 존재를 시간의 물결에서 건져내고, 그리해 영생의 언덕에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썼다. 바쟁의 말에는 미술의 기본 개념과 원리가 모두 담겨 있다. 존재의 간직과 존재의 재현이 그것인데, 사랑하고 동경하며 숭배하는 대상의 간직이 미술의 기본 개념이라면, 그렇게 간직하고 싶은 존재를 가급적 유사하게 묘사해 ‘다시’ 또는 ‘대신’ 보여주는 것, 즉 재현(representation)이 미술의 기본 원리라는 이야기다. 날이 밝으면 전장으로 떠나갈 사랑하는 이를 지금 모습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그의 그림자를 벽에 베끼고 있는 전설 속 코린트의 처녀는 미술의 이런 기본 개념과 원리를 애틋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미술의 첫 번째 모델은 재현이고, 여기서 미술은 미술 외부의 대상 세계를 형상과 색채 같은 조형요소로 눈이 보는 것과 유사하게 묘사한다. 재현의 대상 세계는 관찰을 통해 볼 수 있는 인물, 풍경, 정물처럼 가시적인 경우만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세계나 종교의 초월적 세계처럼 비가시적인 경우도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다 해서 재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비가시적 세계는 서사에 바탕을 두고 재현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현대 이전까지 최소한만 쳐도 3만 년이 넘는 서양미술의 역사에서는 이런 가시적, 비가시적 재현의 다양한 방식이 등장하고 또 순환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대상의 개성을 재현하는 자연주의는 선사시대 최초의 미술에서부터 등장해 고대와 근대에도 나타났고, 대상의 이상을 재현하는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출현한 뒤 근대에 복귀해 대대적으로 체계화됐으며, 중세의 기독교 미술에서 발전한 상징주의는 자연주의를 뒤집는 방식으로 초자연적 대상의 신성을 재현했다.

모리스 루이스, ‘베타 카파’, 1961.
모리스 루이스, ‘베타 카파’, 1961.

그런데 19세기 초에 시작된 현대미술, 그리고 1980년대에 끝났으니 고작 200년도 채 안 되는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서양미술의 전 역사를 뒤집어엎는 전환이 일어난다. 바로 재현을 거부하는 미술의 출현을 통해서다. 따라서 현대와 더불어 서양미술에는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과 원리의 미술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는데, 순수 미술이 그것이다.

순수 미술에서 작가는 창조의 정신을 고독하게 불태우며 오직 그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순수 미술에 대한 독창적인 구상(conception)을 하고, 이 구상을 다시 그 작가만의 독특한 필치로 구성(composition)해서 작품을 만든다. 이렇게 해 ‘미술은 재현’이라는 과거의 모델과 다른 ‘미술은 구성’이라는 현대의 모델이 생겨났다. 과거의 모델이 외부 세계의 간직을 위해 그 세계를 재현했다면, 현대의 모델은 내부 세계의 창조를 위해 그 세계를 구성한다. 여기서 ‘내부 세계’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외부의 현실 세계를 초월하는 순수한 예술의 세계라는 점에서 내부(즉, 예술의 내부)고, 그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 대한 구상이 작가의 내면에 있다는 점에서도 내부(즉, 작가의 내부)인 것이다.

이렇게 세계의 재현 대신 미술의 구성을 추구하는 순수 미술은 당연히 미술의 새로운 존재론과 의미론을 개척해야 했고, 이는 구체적으로 미술의 토대인 매체에 대한 근본 개혁적인 성찰로 집중됐다. 회화의 경우에는 캔버스의 평면성이, 조각의 경우에는 재료의 입체성이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것이다. 여기서 관건은 이 물질적 평면과 입체를 가지고 어떻게 예술적 회화와 조각을 구성하느냐였는데, 이 구성 모델의 산물이 바로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성취, 즉 추상미술이다. 따라서 현대미술의 주축은 추상미술을 구성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혁신해간 미술가들의 역사인데, 이 역사를 회화의 예로 구체화하면 물질적 평면(표면)을 인정하고 제압하는 예술적 평면(화면)의 구성을 창조하고 혁신해간 역사라고 집약할 수 있다.

구성적 추상은 1910∼1920년대 코르넬리스 몬드리안이 파리에서 가장 순수한 형식으로 창조한 이후 대략 네 단계의 혁신을 이어나갔다. 물질적 평면을 인정해 재현의 대상, 가령 3차원의 인물을 재현의 바탕, 즉 캔버스의 2차원 평면에 맞춰 깨뜨린 것은 분석적 입체주의 회화다. 그러나 물질적 평면을 진정 인정한다면 형상을 바탕에 맞춰 깨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3차원의 모든 흔적이 화면에서 깨끗이 사라져야 한다. 그야말로 순수한 추상미술이 요청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물질적 평면을 인정하면서도 제압하는 예술적 평면의 구성에 성공한 몬드리안의 업적이다. 수직과 수평의 선, 이 선들이 구획하는 크고 작은 면, 이 면들을 드문드문 채우는 삼원색으로만 구성된 기하학적 추상은 회화의 물질적 평면에 완전히 밀착한 회화의 요소들을 가지고 예술적 긴장과 균형으로 팽팽한 화면을 성취한 것이다.

조지프 라이트, ‘코린트의 처녀’, 1782∼1784.
조지프 라이트, ‘코린트의 처녀’, 1782∼1784.

구성적 추상의 세계는 1950∼1960년대 뉴욕에서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그 선두는 잘 알려진 대로 잭슨 폴록의 드립 페인팅이다. 이젤 회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벽화 규모의 거대한 캔버스를 선의 율동적인 난무로 가득 채운 폴록의 화면은 몬드리안의 꽉 짜인 기하학적 구성을 완전히 자유분방하게 풀어헤친 구성으로 제시한 것이다. 폴록의 추상에서는 화면을 누비는 선들이 그 어떤 형태의 묘사에도 종속되지 않고(심지어 몬드리안의 추상에서와 같은 사각형조차도 만들어내지 않고) 화면에서 얽히고설키며 빛나는 색채 효과를 낸다. 이 새로운 구성에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회화적 추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세기 초의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이 르네상스 미술과 대조적인 바로크 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회화적인 것’ 개념을 빌려다 쓴 것이다.

그런데 선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혁신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한 이 명칭에는 폴록의 구성에 잠재한 문제를 짚어내는 예리한 측면도 있었다. 일찍이 뵐플린이 설명한 대로, 회화적인 것은 원래 바로크 미술에서 깊은 공간을 암시하는 환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물감과 색채의 고르지 않은 채도 그리고 끊어지거나 희미한 윤곽선 등을 통해 나타나는 회화적인 것은 원근법적인 선들보다 더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깊이 있는 공간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폴록의 회화적 추상은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만큼이나 순수하되, 수직·수평의 선들과 삼원색의 면들이 회화의 평면과 나란히 존재하는 몬드리안의 구성과 달리 선들의 색채로 빛나는 모종의 깊이 있는 공간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회화성에 내재한 공간의 환영에 대한 욕구가 결국은 대상의 재현에 대한 욕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공간의 환영은 그 속에 위치하는 입체적 대상들을 촉각적으로 재현할 때 그 깊은 3차원성이 확실하게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린버그는 ‘정처 없는 재현(homeless representation)’이라고 비난했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회화성 자체에 함축된 공간의 환영이 재현을 끌어들이는 촉각적인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구성의 혁신이 다시 한 번 요구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 폴록의 회화적 추상을 뒤이은 추상의 세 번째 혁신은 클리퍼드 스틸,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등의 색면 추상에서 볼 수 있다. 이 화가들은 표면의 질감을 단념하고 회화 표면을 지극히 얇게 만들어 촉각적 연상을 완전히 배제한 색면을 창조했다. 이들의 색면을 통해 색채는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율성을 얻게 됐는데, 이제 색채는 채색 기능에서 해방돼 그 자체로 독자적인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세로로 긴 장방형 캔버스를 가로로 구획한 기본 포맷을 유지하면서도 한결같이 독창적인 색채들의 화음을 보여주는 로스코 특유의 화면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를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겨 놓는 색면들의 작용에 시선을 붙잡는다. 결과는 그림의 표면 가까이에 머물며 진동하는 색채의 화면인데, 이 화면에서는 그 어떤 촉각성도 연상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림의 화면은 단지 그림의 표면 ‘가까이’를 떠도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표면과 합체할 수도 있음이 밝혀졌다. 1952년 젊은 여성 미술가 헬렌 프랑켄탈러가 선보인 ‘흠뻑 물들이기(soakstain)’라는 방법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그림의 바탕에 물감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게 하는 이 방법을 통해 구성적 추상은 혁신의 마지막 단계인 착색 추상에 도달하게 된다. 모리스 루이스의 작품이 가장 좋은 예다. 루이스는 대개 모서리들만 조금 남기고 캔버스 전체로 물감이 스며들면서 겹치게 해, 표면과 합체한 상태에서도 표면을 분명하게 압도하는 화면, 평평하고도 강렬한 색채 다발들의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표면과 화면의 이런 역관계는 루이스의 마지막 회화 연작 ‘펼침’에서 위태로운 긴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거대한 캔버스의 대부분을 비워놓고 물감을 가장자리에만 몇 줄기 시냇물처럼 졸졸 스며들게 한 그림이다. 이 구성에서 색채의 시냇물들은 양쪽에서 얼추 대칭을 이루며 서로 공명했기에, 캔버스의 한가운데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거대한 물질적 표면을 가로지르며 예술적 화면을 창출했다. 최소한의 화면으로 압도적인 표면을 제압한 것이니, 구성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단연 영웅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제 구성적 추상에는 모리스의 혁신 이상으로 표면을 제압할 수 있는 화면의 가능성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고, 화면과 표면의 대결은 최후에 이른다.

미술이론가


■ 용어설명

정처 없는 재현 :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상당수에서 다시 등장한 재현적 요소를 비판하기 위해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만들어낸 말이다. “추상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재현의 목적을 암시하는 조형적이고 묘사적인 회화성”을 뜻한다. 빌럼 드 쿠닝의 ‘여인’ 연작이 확연한 예다. “문지르고 휘갈기고 비벼대고 흐리게 함으로써 산출된 물감의 불균등한 밀도는 통상 재현과 환영에 이바지하는 명암의 단계적 변화를 창출”하지만, 명암의 이 단계적 변화가 지나치게 두드러지고 또 급하게 병치되기 때문에 전통적인 음영법처럼 깊은 공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결국 추상에 이바지하게 된다. 결국 추상도 재현도 아닌 모순 범벅이라는 말인데, 비판의 초점은 추상미술의 근본, 즉 재현의 거부에 대한 망각이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