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뇌연구 무척 까다롭지만
한 개만 찾아내도 활용 가치 커
고령화·AI 초연결사회 대비
독자적 주제 선택과 집중 필요
1989년부터 매년 연구비 받아
나라에 보답 노력에 賞 주신 듯
세금 지원해주신 국민께 감사
“국민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7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수여하는 ‘2020년도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자로 선정된 서판길(67·사진) 한국뇌연구원 원장의 첫 소감이었다.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SCI(Science Citation Index)급 논문만도 30여 편을 평생 꾸준히 내왔고, 틈틈이 후학 지도에 힘써 37명의 박사와 25명의 석사 제자까지 배출한 ‘대학자’가 왜 자신의 노력을 평가해 상을 받는 자리에서 공무원처럼 애국심을 이야기했을까. ‘닥터 서’는 서울대 의대 생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9년 포항공과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국가 연구·개발(R&D) 자금 수령자로 뽑혔고, 지급받은 ‘국민 세금’ 이상의 탁월한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내놓은 성실한 연구자였기 때문이다. “받은 만큼 나라에 돌려주려 애쓴 노력을 인정해 이번 상도 준 것 아닐까”하는 게 지난 10일 대구 한국뇌연구원에서 만난 그의 첫 발언이었다.
―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무엇을 사회가 인정해서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1989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국책 자금 지원을 받아 연구실을 운영해왔다. 민간 부문과 달리 국가 R&D 자금은 국민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다. 학자 초기에 몸담은 포항공대에서도 포스코재단 연구비를 받아 큰 장비도 사고 별 문제 없이 연구했다. 도와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그의 주전공은 생체신호 전달의 핵심효소인 포스폴리파아제(PLC) 분자 연구다. 뇌에서 3가지 PLC 동위효소를 세계 최초로 분리 정제하고 유전자 클로닝에도 성공했다. 항암제 개발과 줄기세포 분화 등 여러 후속 연구로 연결된 대형 기초연구 성과로 평가된다. 평생 총 348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피인용 횟수가 1만4000여 회에 달할 만큼 다른 학자들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상을 받기 전에도 ‘아산의학상’ 등 참 많은 상을 받으셨다. 연구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계속 이어온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 무엇이 다른 연구자와 차이가 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 관계를 중요시한다. 박사 제자들을 내보낼 때 ‘인연을 끊지 마라’고 이야기한다. 연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소통과 공유가 중요하다. 외가 쪽이 경주 최씨 무영공파로 100리 안에서 큰 부자로 꼽히던 집안이었다. 평소 어머니께서 ‘욕심만큼 베풀어라’고 하셨다. 나 혼자 똑똑한 체 잘나기보다 성실하게 동료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뇌에 지식을 넣는 게 아니라 이제 뇌에서 아이디어를 꺼내는 시대다. 혼자 실험실에서 꼼지락거리는 발명은 현대의 연구방식이 아니다. 책임연구자로서 오전에는 랩(연구팀)을 돌아다니며 연구자들과 대화하고, 밤늦게 연구실에 남아 그제야 개인연구를 했다. 내 전공인 PLC 분자 세포의 개체(쥐)를 달라고 한 동료에게는 다 주었다. 나에게 접촉해온 이들 중 내가 못 주겠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학자로서 평생을 ‘생체 신호전달 기작’ 연구에 바쳤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생명의 경이 혹은 비밀이랄까, 깨달음이 있다면.
“영감 같은 건 없지만 실험을 디자인한 후 밤을 새우며 기다리다 마침내 기대하던 결과가 나왔을 때 희열을 느낀다. 시약의 효과가 2시간 후에나 나기 때문에 실험장치를 차에 싣고 집에 와서 들여다본 적도 많다. 실수와 실패는 버릴 것이 없다. 내가 존경하는 팀 헌트 교수는 세포주기 연구로 노벨상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과학자의 연구는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이라고. 실패한 결과가 훨씬 많다. 그래서 수도승처럼 일해야 한다. 그냥 즐겨라, 실험을.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중시하듯, 생명의 신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분자, 세포, 조직 레벨에서 서로 소통이 잘돼야 병이 안 생긴다.”
―학문의 세계에서 갈수록 융합 연구의 흐름이 거세지고 있다. 뇌 과학도 생물학·의학에서 출발해 계산 신경과학 등 컴퓨터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 중이다. 어떤 융합 연구가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우리는 일본보다 70∼80년 늦게 시작한 과학이지만 10년 내 노벨상이 나올 것으로 믿는다. 우리나라 국민은 도전의식이 강하니까 일본의 오타쿠(마니아) 정신을 넘어설 수 있다. 다만, 굵은 몇 개 원칙 말곤 다 풀어주는 네거티브 규제(오픈 규제)가 필요하다. 특히 과학 연구비를 주면 관리하지 말고 지원하는 게 우선이다. 미꾸라지 1마리 잡으려고 99마리의 붕어를 잡으면 안 된다. 후배들에겐 신바람, 열정을 갖고 ‘즐기는 연구’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 일본에선 융합기술이란 말을 안 쓴다. 자기들도 스스로 우려하고 있다. 문부과학성 통계를 보면 8년 전엔 전 세계에서 우수논문 일본 점유율이 우리의 8배였다. 2년 전에는 3배로 줄었다. 인구 비율대로 딱 됐다.”
―현재 뇌연구원 원장으로 계시는데, 미국·중국 등 강대국들이 경쟁적으로 국력을 집중해 뇌 연구에 매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20년 현재 우리는 왜 뇌를 연구해야 하는가.
“과학자도 사회적, 시대적인 요구를 반영해 중요한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 5000년 과학기술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아직 전담 인력이 적다. 미국, 중국처럼 대형·전방위 연구 말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특히 기초연구를 총괄하는 정부는 필요한 인프라를 깔아줘야 한다. 인류는 아직도 자연계의 현상과 원리를 실생활에 응용하고 있다. 신비한 생명 현상 중에서도 뇌는 연구하기가 무척 힘들다. 연구 자체도 덜 돼 있다. 과학 분야 중 미지의 영역은 우주와 뇌다. 찾을 것도 많고, 찾아내면 활용 가치가 있다. 고령화 사회로 가는데 뇌는 재생 불가능이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정신활동을 대체한다지만 고령화 사회에서 뇌의 퇴행성 질환을 늦추거나 치유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 뇌와 AI의 초연결 사회에도 대비해야 한다.”
대구 = 노성열 기자 nos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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