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 고민
30대 중반 여성입니다. 가족 모두 아빠에게 받은 상처가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소리를 지르거나 때렸습니다. 한번은 음식을 먹기 싫다고 했더니 입을 틀어막고 강제로 먹인 적도 있습니다. 그 기억들이 잊히지 않습니다. 한집에 살지만 말을 안 한 지 오래됐습니다. 엄마는 이제 그만 아빠를 용서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얼굴조차 마주 보기 힘듭니다.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는 제가 싫습니다.
A. 먼저 독립을… 자신 인생 살다 보면 용서의 순간 찾아와
아빠한테 깊은 상처를 받았군요. 그런데 왜 아빠를 용서하려고 애를 쓰나요? 아빠가 진심으로 뉘우치나요? 용서는 시기와 단계와 조건이 있습니다. 용서는 치유의 완성이지 그 시작이 아닙니다. 지금은 억지로 용서를 할 게 아니라 치유를 시작할 때입니다. 자신을 탓하는 대신 아무리 애를 써도 용서가 되지 않는 그 상처받은 마음을 받아줄 때입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나를 지켜줘야 할 부모로부터 당한 폭력은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미움과 분노를 넘어 울분, 배신감, 무력감 등 여러 감정이 뒤엉키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그 파괴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부모를 증오하는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자신까지 증오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학대당한 이들은 자신을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끼며 자학하게 되거나, 그 증오를 가까운 사람들에게 쏟아내며 살아가게 됩니다. 오직 잘 치유된 상처만이 진주를 만들어낼 뿐,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고스란히 독이 됩니다.
아마도 아빠 역시 아빠의 부모로부터 받은 해결되지 못한 상처가 있지 않았을까요? 더 늦기 전에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를 위해 우선 독립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생활적인 독립은 정서적인 독립의 기초가 돼줍니다. 스스로 살아갈 힘을 길러내면 과거와 부모의 영향력에서 좀 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다면 과거도 밝아집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때에 용서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부모 역시 상처받은 한 인간으로 이해되거나 안쓰럽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서 용서하면 됩니다. 그에 비해 머리로 하는 억지용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할 뿐입니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독립에 대한 저항이 생각보다 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는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인생을 계속 망가뜨려서라도 부모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항을 이겨내 파괴가 아닌 창조를 선택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문요한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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