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 양식의 작풍을 구사한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리날도와 아르미다’.
로코코 양식의 작풍을 구사한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리날도와 아르미다’.

■ 김학민의 오페라 문화사 - (12) 고전 오페라의 태동

보헤미아 태생의 빈 작곡가 글루크, ‘퓨전 오페라’ 새 형식 만들어… 바로크의 장식성 덜어내고 단순한 극적 진실 구현
“오케스트라는 극의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음악은 인간 감정의 아름다운 단순성을 지향해야 한다”


오페라의 역사는 그리스 연극의 재현으로 세상의 사연을 담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시작됐지만, 실제로는 음악 잔치로 흘러갔다. 극을 가장한 음악의 놀이는 바로크 시절 이탈리아 오페라의 스타 헨델도,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던 프랑스 오페라의 대부(大父) 륄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초기 오페라의 위대한 작곡가, 몬테베르디가 실현해낸 음악극(‘드라마 페르 무지카’)의 정신은 길을 잃었다. 하지만 간혹 예외도 있었다. 많은 음악학자가 그 예로 세 명을 꼽는다. 글루크는 모차르트, 바그너 외 남은 한 명이다. 글루크가 어떤 식으로 음악극의 이상을 실현해냈는지를 알아보자.

◇오페라의 혼종

바로크 시대(1600∼1750년경)에는 유럽 각 나라의 오페라가 명확히 구별됐지만, 신고전주의 시대(1750∼1800년경)로 다가서며 오페라의 국경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로크 시대에 이탈리아인들은 노래의 아름다움과 형식성을 중시한 메타스타시오식의 ‘오페라 세리아’로 오페라 종주국의 자부심을 누렸고, 프랑스인들은 발레와 고전 비극의 전통을 살린 ‘음악 비극’(트라제디 리리크)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에 맞섰다. 가벼운 양식으로 된 코믹 오페라도 ‘오페라 부파’(이탈리아), ‘오페라 코미크’(프랑스), ‘징슈필’(독일), ‘발라드 오페라’(영국) 등 나라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었다.

프랑스인은 루이 14세 시절에 쇼비니즘에 가깝도록 이탈리아 오페라를 배척했지만, 조금씩 이탈리아 오페라의 장점을 흡수했다. 변화는 루이 14세의 강력한 후광으로 베르사유 궁전과 팔레 루아얄 극장을 장악한 장 바티스트 륄리(1632∼1687)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였다. 음악적으로 ‘로코코 양식’ 혹은 ‘갈랑 양식’에 해당하는 일련의 작곡가들이 활동했다. 파스칼 콜라스(1649∼1709), 앙드레 캉프라(1660∼1744), 마랭 마레(1656∼1728)에 이어 장 필리프 라모(1683∼1764)는 륄리가 확립한 음악 비극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대담한 화성과 색채감 있는 오케스트라 기법을 통해 이탈리아 오페라가 추구했던 노래의 자유분방함과 감정표현의 자연스러움을 지향했다.

변화의 결정적 계기는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지(1710∼1736)의 오페라 부파 ‘마님이 된 하녀’의 파리 순회공연(1746, 1752)이었다. 두 번째 순회공연 때 파리 음악계는 두 파로 나뉘어 요란한 다툼을 벌였다. ‘팸플릿 전쟁’ 혹은 ‘부퐁 논쟁’이라 부르는 이 다툼에서 진보 진영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자연스러움과 활력에 감동해 프랑스 오페라(음악 비극)의 고리타분함과 현학성을 통렬히 비판했다. 선봉에 섰던 계몽주의 철학가 장 자크 루소는 오페라 코미크 ‘마을의 점쟁이’(1752)를 직접 작곡·작사하는 열성을 보이면서, 자연스러움과 일상성, 쉬움의 아름다움을 갖춘 이탈리아 오페라의 ‘홍보대사’ 역을 톡톡히 해냈다.

이탈리아인도 오페라 종주국의 자존심을 버리고 프랑스 오페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니콜로 욤멜리(1714∼1774)는 라모의 프랑스 오페라를 특히 좋아해 라모처럼 대담무쌍한 화성과 극적 표현을 시도했다. 한편 톰마소 트라에타(1727∼1779)는 파르마 공작 밑에 있으면서 파리 출신의 오페라 감독(기욤므 뒤 틸로)을 통해 접한 라모 오페라의 장점을 오페라 세리아에 가미시켰다. 한 예로 트라에타의 ‘이폴리토와 아리치아’(1759, 파르마)는 라모의 ‘이폴리트와 아리시’(1733, 팔레 루아얄)를 모방해 발레와 스펙터클한 장면, 빈번한 합창 등 프랑스 오페라의 특징과 정통 이탈리아 오페라(오페라 세리아)의 융합을 시도했다.

‘개혁 오페라의 승리자’ 크리스토프 빌발트 글루크의 초상화.
‘개혁 오페라의 승리자’ 크리스토프 빌발트 글루크의 초상화.

◇글루크의 오페라 융합

이탈리아 오페라와 프랑스 오페라를 섞은 ‘퓨전’ 오페라의 최후 승자는 보헤미아 태생의 빈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발트 글루크(1714∼1787)였다. 그는 빈과 파리에서 일련의 오페라들을 성공시켜 이탈리아 및 프랑스 오페라를 하나로 합친 ‘개혁’ 오페라의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했다. 비결은 규범 깨부수기였다. 글루크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반복이 낳은 도식성(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을 깨부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발레와 합창의 진부함·장식성(프랑스의 음악 비극)도 부수고, 빈 공간에 글루크 표의 새로운 오페라를 세웠다. 글루크는 당시 유럽 각 국가의 음악 및 오페라 전통에서 좋은 것들을 가져왔다. 독일 음악에서 발달한 뛰어난 오케스트라 수법을 가져왔고, 이탈리아에서는 선율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형식의 유연함과 연극성을 가져왔다.

글루크 오페라가 이탈리아 오페라인지 프랑스 오페라인지는 별 의미가 없다. 당대 글루크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던 나라들에서는 저마다 글루크 오페라가 자기네 나라의 오페라라 자부했지만, 중요한 건 국적이 아니라 스타일이었다. 글루크 오페라는 바로크 시대 진지한 오페라의 장식성을 덜어내고 자연스러움과 단순미, 극적 진실의 구현이라고 하는 고전음악의 새로운 미학을 실현했다. 이전까지의 단순 혼종(퓨전)을 넘어 융합의 상태를 지향한 그의 오페라가 위대한 이유다.

궁전의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허연 얼굴 분칠, 무겁고 커다란 가발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리스식의 간단한 가운과 자연스러운 생머리가 등장했다. 신고전주의적 새로움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다국적 대본작가 라니에리 데 칼자비지(1714∼1795)가 큰 몫을 해냈다. 칼자비지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7년간 파리에 체류하면서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의 아이콘이던 메타스타시오 오페라를 지지한 평론 활동을 펼쳤으나, 빈으로 거처를 옮기며(1761) 급격하게 반(反)메타스타시오 운동을 펼쳤다.

당시 빈 궁전의 신임 극장 감독, 자코모 두라초 백작의 공로도 컸다. 두라초 백작은 구태의연한 메타스타시오 오페라에 반감을 표하면서 글루크와 칼자비지를 옹호했다. 이렇게 해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역사적 초연(1762 빈, 부르크테아터)이 이뤄졌고, 후속으로 ‘알체스테’(1767), ‘아우리스의 이피게니’(1774),‘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1779)가 이어졌다. 이 작품들에 대해 빈 청중은 경의를 표했고, 이후 프랑스어로 바꾼 파리판 공연을 본 파리 청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의 유물과 흔적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의 유물과 흔적들.

◇부활한 오르페오

글루크의 대표작이자 개혁 오페라의 위대한 시작을 알린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시작부터 달랐다. 정통 오페라 세리아의 육중한 서곡과 달리 이례적으로 명랑한 서곡이 흐른다. 알고 보니 이전의 행복한 장면을 묘사하기 위함이었다. 막이 오르면 에우리디체의 무덤이 보이고, 그녀가 풀밭에서 뱀에 물려 죽는 신화 속 사건은 막이 열리기 전에 벌어진 것으로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여주인공이 이미 죽은 것에서 시작하니, 결혼식이나 행복한 모습은 필요 없다. 밝은 서곡에 이어지는 단조로 된 슬픔의 합창(c단조)은 라모의 음악 비극처럼 단순하면서도 초점이 있는 호모포니(선율 하나에 반주를 붙이는 형태의 음악 짜임새)로 돼 있고, 단순함 속에는 슬픔의 통렬함이 깃들어 있다. 이어서 남자 주인공(오르페오)이 외치는 세 번에 걸친 ‘에우리디체!’란 짤막한 외침은 연극적이면서도 음악적으로 아름답다. 합창과 발레를 기본으로 한 지옥 장면(2막)이 구현하는 어둠의 세계는 1막이 담았던 빛의 세계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춤과 합창은 보여줌과 즐김의 차원에서 벗어나, 주인공의 절박한 심정과 지옥의 끔찍한 환경을 극화해준다.

이 오페라는 125년 전 몬테베르디가 만든 ‘오르페오’(1637, 베네치아)의 환생이었다.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전개와 극적 초점이 있어 큰 변화를 이뤘지만, 근본적으로는 드라마를 음악으로 구현해낸다는 ‘드라마 페르 무지카’의 초기 오페라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글루크가 쓴 ‘알체스테’의 헌정사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Strunk편, 1950, 673∼675)

‘가수의 허망함은 제한돼야 하고, 음악은 액션을 더디게 하거나 무가치한 과도한 장식음으로 액션을 묻히게 하지 말고 대신 이야기의 상황을 따라가야 한다…. 오케스트라는 극의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서곡의 음악은 의미를 지녀야 한다. 종합해서, 음악은 인간 감정의 ‘아름다운 단순성’을 지향해야 한다.’

경희대 연극영화과 교수


■ 용어설명

로코코 양식 : 18세기 초중반 프랑스에서 유행한 회화·장식 예술에서 시작된 예술 사조. 바로크 양식의 정점을 찍은 루이 14세에 이어 루이 15세(1715∼1774 제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베르사유 궁전 문화 및 예술은 대규모에서 소규모로, 형식성에서 친밀함과 쾌활함으로 변화했다.

신고전주의 양식 : 18세기 중후반 회화와 건축, 조각, 음악, 문학 분야에서 유행한 예술사조. 헤르쿨라네움(이탈리아어로 에르콜라노)과 폼페이와 같은 고대 로마 도시들의 복원, 요한 빙켈만(1717∼1768)의 저술들(고대 미술의 역사, 1764), 독일 철학가 칸트의 저술들(순수이성비판)이 영향을 줬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그리스, 로마의 문명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으나 고대문명의 예술작품들에서 발견한 명료성과 균형미, 논리적 질서, 단순성, 절제의 미학을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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