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요즘 진인 조은산의 ‘시무7조’ 상소문이 회자되고 있다. 아직도 조선왕조 시대의 문화가 뿌리 깊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1일 발표된 2020∼2024년 국가재정운용계획과 2021년도 예산안에서 새삼 조선 시대가 떠오른다. 그때의 실패를 반복할까 염려된다.

내년 예산안과 향후 5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담긴 철학은 ‘확대재정 만병통치’다. 국가재정으로 코로나19 경제위기도 극복하고, 친환경 첨단산업도 키워내고, 포용적 복지국가를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경제위기 때 정부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시장은 무시하고 재정중독에 빠진 듯하다. 2021년 세계 경제가 5.4% 성장하는 등 대외 여건의 호전으로 한국경제도 반등할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GDP 대비 5% 후반대의 재정적자를 지속해 2020년 GDP의 39.8%인 국가채무를 2024년 58.3%까지 늘리겠다고 한다.

2021년 예산안에도 ‘확대재정 만병통치’ 철학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고용과 복지 예산이 많이 늘었다. 10.7% 증가한 199조9000억 원이다. 경제위기 때 확대 지출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고용과 복지를 재정으로만 풀려고 하는 것이다. 기업을 살리고, 위기가 기회라며 도전할 공간을 열어 주면 나랏돈 안 쓰고도 일자리가 생기고 소득이 늘어나는 길이 생긴다. 그런데 문 정부는 규제를 풀긴커녕 경제정의 실현이라며 시장을 더 옥죄기만 한다.

성종 4년(1473년) 영의정 신숙주의 진언이다. ‘원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 전라도 백성이 스스로 장문(場門; 시장)을 열었는데 이 덕분에 흉년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나주 목사 이영건은 장문을 인정하도록 청했지만, 호조에서 금지해 1000년에 한 번 있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장문의 덕으로 기근을 극복했으므로 남쪽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장문입니다.’ 농민들은 농한기에 틈틈이 면포를 짜거나 수공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면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경상도에 가뭄이 들어 곡식 생산이 안 되면, 면포라도 들고 시장에 가서 전라도 쌀을 사 먹으면 굶어 죽진 않았다. ‘사농공상’ 프레임에 빠져 있던 조선은 상업을 조장하는 시장을 적대시했다. 대신 구휼을 국가가 책임져, 호당 저장 곡물량 기준으로 청나라의 5배에 이르는 환곡(구휼미)을 운용했다. 그러나 시장이 억제된 상태에서 구휼미는 늘 부족했고, 기근이 들 때마다 부호에게 곡식을 거둬 진휼에 썼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숙종 때 좌참판 이단하의 상소문이다. ‘각 지역에 곡물을 증식하는 부호 가구가 있었고, 백성은 관곡보다는 오히려 민간의 곡물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관리들이 민간의 대부를 막고 부호를 마치 원수 보듯이 억압하고, 부호로부터 곡물을 빼앗아 빈민구제에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부호가 곡물을 증식시키려 하지 않아 지역에는 저장곡이 없어졌습니다.’(박광준, ‘조선왕조의 빈곤정책’)

문 정부 들어 부자 증세가 한창이다. ‘확대재정 만병통치’ 때문에 생긴 텅 빈 곳간을 채워야 하고, 부자들 때문에 양극화와 부동산 투기가 발생했다며 징벌을 내린다.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 세수의 80%를, 상위 1%의 기업이 법인세의 80%를 부담하고 있지만, 포상을 하긴커녕 징벌만 늘어난다. 시장을 활성화하고 도전과 성취를 인정해 주면 경제위기를 더 빨리 극복하고 저장곡도 키울 수 있을 텐데, 조선왕조 시대로 돌아간 듯한 요즘이다. 경제정책만큼은 조선 시대로 회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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