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주자급 여당 대표의 성공과 실패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9일 176석 거대 여당 사령탑으로 취임했다. 전당대회 기간 내내 당내에선 이 대표의 출마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대선 출마를 위해선 1년 전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당헌·당규에 따라 내년 3월 9일 이전에 사퇴해야 하는 이 대표의 당권 도전이 과연 타당하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7개월가량의 여당 대표 경력이 이 대표의 대선 가도에 득이 될지에 대한 논란도 여전하다.


정치권에선 이 대표가 ‘7개월 시한부’라는 한계에도 출마를 강행한 배경엔 당권을 넘어 대권을 향한 포석이라는 시각이 다수다. 집권 여당 대표는 청와대·정부와 삼각편대를 이뤄 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지녔다. 당 인사권을 쥐고 있어 당을 자기 색깔로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임기 말 정권의 명과 암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선 대권 도전에 악재가 될 수도 있다. ‘떠오르는 미래 권력’인 대선 주자급 여당 대표는 ‘지는 권력’인 현직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 여당 대표 신분으로 대권에 도전했던 인물들은 어김없이 현직 대통령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자유당 총재로 노태우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된 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는 등 이명박 정부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열린우리당 당 의장을 지낸 정동영 전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당인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차별화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진 건 아니다. 유권자가 이러한 차별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받아들였을 때만이 대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군사정권과 결별한 김영삼 = 1990년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앞세운 신민주공화당과 이른바 ‘3당 합당’을 강행한다.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소야대 결과를 받아든 노태우 대통령의 승부수라는 평가와 함께 군사독재에 맞서 온 김 전 대통령의 선택을 두고 진보 진영에선 ‘야합’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초대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된 김 전 대통령은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어록을 남기며 정면승부를 택했다.

1992년 5월, 민자당 14대 대선 후보로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대권을 잡는다면 군부세력과 단호히 결별하고 문민정부의 기틀을 잡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그해 8월 노 대통령이 민자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김 전 대통령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었다.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서 김 전 대통령은 “노태우는 나의 당선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자신이 탈당할 경우 당이 분열돼서 결국 나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질 것이라는 계산까지 하고 있었다”고 돌아봤다.

김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노태우 정부와 한배를 탔지만, 문민시대를 열었다는 정당성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선 이후에도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과 부패척결을 강조하며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이전 정권과 결별하는 데 성공했다.

◇선거로 실력을 증명한 박근혜 = 박 전 대통령은 17대 대선을 앞두고 진행된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친이(친이명박)와 친박(친박근혜)으로 갈라져 난타전을 펼쳤다. 결과는 박 전 대통령의 패배. 문제는 18대 총선에서 터지고 말았다. 당시 친이계는 앙금이 남았던 친박계 인사를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일명 공천학살이 자행된 것. 이에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을 탈당, 친박연대를 만들었다. 친박연대에 들어가지 않은 인사들도 친박 무소속 연대를 구성해 출마했다. 박 전 대통령은 “살아서 돌아오라”며 이들을 지원했다. 친박연대는 대구·경북(TK)에서 14석을 얻는 파란을 일으켰고, 친박 무소속 연대까지 합하면 26명의 인사가 생환했다. 한나라당은 결국 생존한 친박계 인사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박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직접 반대토론에 나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정권과 각을 세웠다. 사실상 여당 내 야당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자리에 오른 박 전 대통령은 이듬해 2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19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대선 후보로의 입지를 다진다. 한 정치권 인사는 “공천학살과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결국 유권자가 이명박 정부와는 별개의 정치세력으로 박 전 대통령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탈당까지 불사했지만, 차별화에 실패한 정동영 = 열린우리당 두 번째 당 의장을 맡은 정동영 전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맞은 17대 총선에서 과반 압승을 이끌며 높은 인기를 구가한다. 비록 총선 전 ‘노인 폄하’ 발언으로 치명타를 입긴 했지만, 노무현 정부 통일부 장관을 지내는 등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2006년 다시 의장이 된 정 전 의원은 제4회 지방선거에서 광역자치단체장 1석을 얻는 데 그치는 참패를 기록하며 상처를 입었다. 이후 극심한 노무현 정부 레임덕이 시작된 2007년 1월 다수의 의원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며 살길을 모색하자 정 전 의원도 이를 버티지 못하고 6월 당을 떠나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한다. 정 전 의원은 노 대통령을 향해 “독선과 오만에 기초한 권력을 가진 자가 휘두르는 공포정치의 변종”이라고 말하는 등 날 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와 선 긋기에도 정 전 의원은 17대 대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531만 표 차이로 패배하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의 인기가 워낙 없었던 시기에 치러진 대선이었기에 정 전 의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면서도 “정 전 의원이 자랑하던 개혁 이미지가 노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훼손된 부분도 대패의 원인으로 꼽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낙연은 문재인을 넘을 수 있을까? = 정치권에선 이 대표의 대권 가도의 핵심으로 문재인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을 꼽는 의견이 많다. 과거 정권과 비교했을 때 문재인 정부가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이 대표가 어떤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느냐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결국 유권자가 이 대표만의 비전을 인정했을 때 진정으로 유력 주자가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민주당의 중진 의원은 “문재인 정부를 계승하면서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이 대표에게 과연 있느냐, 이 점을 국민이 냉정하게 평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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