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가 아버지·누나와 함께한 유럽 연주 여행을 묘사한 루이 카르몽텔의 수채화.
모차르트가 아버지·누나와 함께한 유럽 연주 여행을 묘사한 루이 카르몽텔의 수채화.

■ 김학민의 오페라 문화사 - (13) 모차르트 오페라

성실하고 치열했던 神童, 황제 취향 맞춰 가볍고 즐거운 오페라 작곡…작품 ‘후궁 탈출’ 통치자의 자비 부각하려다 생뚱맞은 결말도
사회 비판적 요소 빈 오페라 부파의 전반적 성향… 모차르트 트레이드 마크된 ‘앙상블 피날레’ 그 시절 유행했던 엔딩 기법


‘천상의 음악’으로 불리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모차르트는 교향곡·협주곡·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고전주의 음악을 이끌었지만, 그의 진정한 본령은 오페라였다. 고전주의의 단순미와 질서·균형의 세계를 넘어 고독한 개인의 정서를 담은 낭만주의로 들어섰다는 찬사를 받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세계는 천재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화인가?

영화 ‘아마데우스’(1984)의 원작자, 피터 셰퍼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노인이 된 살리에리(빈 궁정음악가)가 털어놓는 고해성사로 극화했다. “음악은 처음에는 단조롭게 시작됐죠…. 갑자기 오보에의 소리가 들려왔는데… 저는 그만 숨이 막힐 것 같았어요. 악기들이 흐느끼듯 얽히며 저의 영혼을 사로잡았어요. 하느님께 외쳤습니다. 대체 이것이 뭡니까? 이것이 진정 당신의 뜻입니까? 저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피터 셰퍼, 1979)

살리에리의 고해성사는 모차르트 음악(목관을 위한 세레나데 10번, 3악장 아다지오)을 들은 벅찬 감동과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심을 말하고 있다. 작고 마른 체구에 툭 튀어나온 두 눈, 어릴 적 앓은 천연두로 얽은 얼굴, 외설적인 농담과 경박한 웃음…. 모차르트는 어디를 봐도 천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으나(Solomon, 1995) 그는 분명 천재였다. 그는 5세 때 다섯 편의 소품을 작곡하고, 7세 때 교향곡을, 12세 때는 단막 오페라(바스티앵과 바스티엔)를 작곡했다. 어릴 적 9년간에 걸친 유럽 연주 여행(1762∼1771)에서는 프란시스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빈·6세), 루이 15세와 조지 3세(파리와 런던·8세)로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탈리아 여행(1769∼1773)에서는 로마 시스티나 성당에서 성가 연주(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두 번 듣고 그대로 옮겨 적어 바티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Gutman, 2000)

모차르트의 7세 시절 초상화. 피에트로 안토니오 로렌조니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모차르트의 7세 시절 초상화. 피에트로 안토니오 로렌조니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시절(1772∼1781)을 거쳐 빈 시절(1781∼1791)에 신동으로서가 아니라 ‘재능은 있으나 크게 각광 받지 못한’ 작곡가로 살았다. 그가 35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게 되자, 전기작가·학자들은 그에 대한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낭만주의 시절에 ‘피가로의 결혼’(1786)은 ‘프랑스 혁명의 예고편’으로, ‘돈 조반니’(1787)는 파우스트에 버금가는 ‘낭만적 반항아’의 이야기로 숭배됐다.

피터 셰퍼의 희곡과 영화 ‘아마데우스’는 20세기의 모차르트 신화를 완성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비관한 살리에리의 질투와 돈에 쪼들려 ‘레퀴엠’을 완성하느라 밤샘 작업을 하다 쓰러져 비참한 최후를 맞는 모차르트의 모습은 그의 천재성을 부각했다. 살리에리와 더불어 그 시절 수많은 작곡가가 졸지에 모차르트의 그늘에 가려버렸고,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후광으로 그의 생가가 있는 잘츠부르크와 그의 활동지 빈은 ‘모차르트 초콜릿’을 파는 관광 명소이자 성지(聖地)가 됐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짧지만 치열했던 삶 속에 쏟아부은 ‘성실성과 오랜 작업’의 결과였고(Solomon, 1995), 당시 유럽의 값진 음악·오페라 유산이 기름진 토양 역할을 했다. 그 시절, 빈에서 활동하며 오페라의 개혁을 시도했던 글루크와 새 시대 신양식으로 급부상한 ‘오페라 부파’의 수많은 작곡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모차르트도 없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모차르트에게는 꿈의 도시였다. 빈은 25세의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의 안정된 일자리(콜로레도 대주교의 음악감독)를 떨치고 당차게 프리랜서의 삶을 시작한 도시였다. 당시 빈은 유럽의 다양한 음악·오페라를 빨대처럼 흡수한 문화의 용광로이자, 사상·문화·예술의 집결지였다. 수많은 작곡가가 돈과 명성을 위해 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모차르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였던 요제프 2세(1765∼1790 재위)는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부터 유행했던 프랑스 오페라와 정통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오페라 부파를 좋아했다. ‘가볍고 즐거운’ 오페라를 선호했던 황제의 취미에 부합하기 위해 모차르트는 빈 시절 거의 모든 오페라를 코믹 오페라로 작곡했다. 유일한 예외인 오페라 세리아 ‘티토왕의 자비’(1791년 9월, 프라하)도 요제프 황제가 죽은 후 새로운 통치자가 된 레오폴트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잘츠부르크 게트리데가세 9번가에 있는 모차르트 생가.
잘츠부르크 게트리데가세 9번가에 있는 모차르트 생가.

모차르트가 독일 오페라(징슈필)를 쓴 것은 독일 오페라를 육성하려 했던 요제프 2세의 문화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황제는 오페라 부파를 좋아했지만, 헝가리, 체코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의 시민을 ‘교화’하려는 야심으로 독일 오페라를 장려했다. 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공동 통치하던 시절에 궁정극장이던 부르크테아터를 ‘독일 국립극장’으로 개명했고(1776), 이곳에 ‘독일 국립징슈필’(1778∼1785)이라는 오페라단을 설립했다.

빈 초기에 황제 위촉으로 쓴 징슈필 ‘후궁 탈출’(1782, 부르크테아터)은 터키의 하렘(왕의 여인들이 칩거하는 곳)에 포로가 된 스페인 여인(콘스탄체)을 약혼남(벨몬테)이 구출한다는, 용맹과 덕성을 찬양하는 평범한 내용이다. 끝에 태수(파샤 제림)는 콘스탄체를 원하지만, 약혼남과의 진심 어린 사랑에 감동해 이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 준다. 이처럼 생뚱맞은 결말의 이면에는 통치자의 자비로움을 부각하고 싶어 했던 요제프 황제의 계몽 군주적 모습이 숨어 있었다.

오페라 부파의 경우, 황제 시절 빈에는 모차르트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린 작곡가가 즐비했다.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되던 해(1786년 5월, 부르크테아터) 이 극장에는 ‘의사와 약제사’(카를 디테르스도르프), ‘착한 구두쇠’와 ‘희귀한 일’(비센테 마르틴 이 솔레르) 등의 신작 오페라들이 성황리에 공연됐다. 조반니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와 ‘세비야의 이발사’ 등 네 편의 오페라도 재공연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했다. (Polzonetti) 이 중 ‘세비야의 이발사’(1782,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곡가 조반니 파이시엘로는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코믹성과 예리한 성격 묘사로 당시 빈 청중으로부터 모차르트보다 더 큰 인기와 찬사를 받았고, ‘희귀한 일’의 작곡가 마르틴 이 솔레르의 인기도 대단했다.

모차르트가 남긴 불후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성공은 많은 사람이 치켜세우듯 모차르트가 각별한 혁명 사상이나 자유주의 성향을 지녀서가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정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대본작가 로렌초 다 폰테(1749∼1838)도 베네치아·미국 등을 전전한 세기의 바람둥이에 도박꾼이었다. 다 폰테는 황제의 공연허가를 얻기 위해 ‘피가로의 결혼’의 원작자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곡에 들어 있는 혁명 사상을 희석했다.

이 작품에 담긴 사회 비판적 요소들(초야권 폐지, 엉큼한 속셈을 가진 귀족남에 대한 조롱)은 빈 오페라 부파의 전반적인 성향이었다. 당시 빈의 오페라 부파는 “보수적 질서의 전복”을 빈번하게 표현했지만, 모든 것은 “여흥이라는 문화적으로 안전한 틀의 범위 안에서 이뤄졌다”. (Hunter) 황제는 위험한 작품을 후원한 계몽 군주의 모습을 은근히 과시하면서도 ‘정치적 중화·무효화’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했던 것이다.

오늘날 모차르트의 트레이드 마크로 돼 있는 역동적 엔딩 기법(앙상블 피날레)도 이미 그 시절 빈에 통용되던 음악적 약속이었다. 당시 앙상블 피날레는 개인들의 다채로운 관계와 집단의 다이내믹을 오페라에 담아내기 위해 개발된 새로운 스토리텔링 기법이었다. 앙상블 피날레는 서로 다른 계급과 성(性)·인종·나이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복잡한 사연과 욕망의 충돌을 담았다. 변장·모략·설득·회피·대결은 갈등으로 비등점에 이르다가, 마지막에 귀족과 중산층·하인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행복한 대합창을 부른다. (Delonna & Plozonetti, 2009)

‘피가로의 결혼’ 이후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로 프라하에서 인기를 끌었으나, 이때부터 그는 서서히 쇠락하고 있었다. “빈은 변덕이 많은 도시였다”. (Kamien, 김학민 역, 1993) 빈 귀족들은 처음에는 그의 음악에 경탄했으나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살리에리의 음악같이 경쾌하고 우아한 로코코풍 음악을 좋아했던 빈 청중의 귀에 모차르트 오페라는 너무 심각했다. 요제프 2세의 죽음(1790년 2월 20일)은 모차르트와 빈의 인연을 결정적으로 끊어놓은 사건이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초연된 ‘마술피리’(1791, 빈 비덴극장)는 요제프 2세의 죽음 이후 도시의 허름한 외곽 극장에서 초연됐다. ‘마술피리’의 초연 포스터에는 흥행주이자 배우(파파게노 역)였던 에마누엘 시카네더의 이름은 크게 두드러져 있었지만, 정작 작곡가 모차르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모차르트가 죽은 이유에는 많은 설이 있다. 살리에리의 독살, 프리메이슨 단원의 독살 등 무수한 추측의 이면에는 짧은 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인간 모차르트’의 내재된 고뇌가 숨어 있다.

경희대 연극영화과 교수 <시리즈 끝>


■ 용어설명

징슈필 : 18세기 중반 이후 발전한 독일 민족오페라. 모차르트·디테르스도르프 등에 의해 발전을 거듭했으며, 베토벤·바그너로 이어지면서 독일 오페라의 모태가 됐다.

부르크테아터 :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문으로 개관한 빈의 궁정극장. 요제프 2세 시절 모차르트의 많은 오페라가 이곳에서 초연 혹은 재공연됐다.

앙상블 피날레 : 오페라 부파의 한 막 끝에 나오는 긴 노래 장면. 오케스트라의 연속적 흐름 속에서 대화풍 노래와 중창·합창 등이 여러 섹션으로 나뉘어 나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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