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원(1937∼)

문화방송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여느 날처럼 출근하던 1969년 그날 아침,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두 살이던 내가 갑자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문 앞을 막아섰더란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내 손에 동전을 쥐여주셨다. “출근비입니다. 다녀올게요.” 아버지는 자상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내게 아버지가 미국에 출장을 가셨다고 했다. 크리스마스에 짠하고 돌아오신다고 해 나는 크리스마스만 기다렸다. 돌아오시면 퇴근비도 받아야지, 했다. 하지만 그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수없이 달력을 넘겼지만,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머리가 좀 더 자란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김포행 비행기를 타셨던 아버지는 대관령 상공에서 납북되셨다. 기억하는 이 있겠느냐마는 당시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KAL기 납북사건, 그 비행기에 아버지가 타고 계셨던 것이다. 북한군에 끌려가신 아버지는 공산주의 이론을 반박하고 항공기 국제법과 관습법에 의거해 전원 송환을 요구하며 그들을 의연하게 꾸짖으셨다. 북한은 결국 몇 분의 납치자를 남한으로 돌려보냈지만, 아버지는 제외했다. 삼촌들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아버지의 성격을 탓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장독대에 올라가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곤 했다. ‘북녘에 계신 아버지도 지금 나와 함께 저 달을 볼 거야’ 하며 그리움을 삼켰다. 나는 커가며 더욱 아버지를 닮아갔다. 그런 나를 부여잡고 할머니는 많이도 우셨다. “아이고 내 새끼, 너를 보면 네 아비가 생각나고, 네 아비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찌르르하구나.” 그 말을 듣고 내 코끝도 찡해졌다. 우리 가족은 생이별의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내가 서른네 살이던 2001년, 아버지와 함께 납북 당했던 승무원 한 분이 이산가족 상봉장에 나왔다. 나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이미 헤이그 협약도 양국에 비준돼 있으니 간단하리라 생각했다. 순진했다. “1969년도 사건이 현 정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부터 “옛날 일을 왜 자꾸 들춰내느냐?”는 멸시와 타박을 받았다. 북한이 납치를 부인하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는 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헤이그 협약의 비준 시기까지 트집 잡아선 안 된다는 정부의 무책임함에 나는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KAL기 납북사건은 전 세계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유일한 하이재킹(High Jacking) 사건이다. 우리로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항공법에서는 정해진 도착지에 승객과 승무원들이 내리고 비행기의 문이 닫혀야만 비행이 종료된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직 하늘에 둥둥 떠 계시는 신세인 것이다. 조국에서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고, 항공법상으로는 아직도 땅을 밟지 못하신 아버지의 신세가 애처롭다.

최근에는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이 아버지를 포함해 당시 납북된 11명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나는 20년째 그때의 아버지처럼 항공기 국제법과 관습법에 따라 아버지와 다른 열 분의 송환을 요구하며 절규하고 있다. “아버지, 두 살배기 인철이가 이제는 오십이 넘었습니다. 너무도 그립습니다. 살아계셔요! 꼭 만나고 싶습니다.” 오늘 밤에도 환한 달이 떴으면 좋겠다.

아들 황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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