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자(1950~2004)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계절은 벌써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물들고 중력을 이기지 못한 잎들은 경주라도 하듯 땅바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버스가 들어왔다 나가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각은 어디 가누?”

“네, 할머니 저는 친구들 보러 갑니다. 할머니는요?”

“응, 나는 아들 보러 왔다가 집에 가는 길이지.”

“아∼ 아드님 보셔서 기쁘셨겠어요?”

“암∼ 어릴 때부터 반듯했지, 인물도 훤하고 착했어.”

할머니의 얼굴에 짙게 팬 주름살 사이로 옅은 미소가 번지는 게 보였다. 시선을 돌려 버스가 오는 길을 바라봤다.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날이었다. 손등을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가 내 손등을 치며 물었다.

“근데 손에 든 건 뭐요?”

“아, 이거요? 책이에요.”

“무슨 책이길래 그렇게 많누?”

“제가 쓴 책인데요, 친구들한테 선물로 주려고요. 친구가 좀 많아요. 하하하. 근데 친구들이 좋아할지 모르겠어요.”

“음…, 우리 아들놈도 책을 좋아해서 내가 왔는데도 책만 보더구먼… 속이 좀 상했지.”

“네…, 어! 할머니 버스 오네요.”

저 멀리 굽은 길을 돌아 나오던 버스는 앞 유리창이 햇빛을 받아 순간 반짝하더니 우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가방을 등에 메고 책보자기를 챙겨 버스의 앞문이 우리 앞에 위치하도록 기사에게 손짓했다. 이내 버스는 우리가 타기 좋은 위치에 멈춰 섰다. 할머니를 먼저 태우려고 뒤를 돌아봤는데 할머니가 안 보였다. ‘어디 가셨지?’

“할머니∼ 할머니∼ 버스 왔어요.”

몇 번을 부르며 주위를 둘러봐도 할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 계속되자 기사가 재촉하며 말했다.

“빨리 타요! 출발해야 됩니다.”

“아, 죄송합니다. 할머니가 타셔야 되는데….”

“할머니라니 혼자 있던데, 어서 타요.”

하는 수 없이 버스에 올랐다. 서둘러 빈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이 닫히고 버스는 서서히 출발했다. 갑자기 뭔가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돌아가셨을까. 손녀에게 전할 말이나 물건이 있었던 걸까.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바닥에 놓아둔 책보자기를 발로 툭 건드렸다. 부피가 크다 보니 지나가다 걸린 모양이었다. 죄송하다고 눈인사를 드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책보자기를 안쪽으로 들이기 위해 보자기를 묶은 매듭을 잡으려는데 뭔가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삐져나와 있었다. 꼼꼼하게 접힌 노란색 종이였다. 찢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펼치자 삐뚤삐뚤하게 적힌 글자가 나타났다. ‘엄마 안 보고 싶었어? 늘 차 조심하고 너무 늦게 다니지 말어.’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난 5월 꿈에 나타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리운 어머니는 16년 전 돌아가셨다. 추석을 앞두고 오늘따라 어머니가 유난히 보고 싶다.

장남 배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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