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 前 駐유엔 대사

우리 어업지도선 공무원이 서해상에서 표류 중 북한군에 잡혀 수 시간 동안 바다 위에서 조사받다가 무자비하게 총격 살해되고 처참히 불태워졌다. 북측이 25일 보내온 구두 통지 속에서 김정은은 대단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못 인정 없이 피살 공무원을 불법 침입자라 했고, 시간 경과에 따른 구체적 상황 설명도 없어 사실을 은폐, 왜곡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27일 북한은 방송을 통해 앞으로 남측이 자신들이 영해로 주장하는 해상분계선 무단침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서훈 안보실장은 앞서 남북한 정상 간 서한 교환 사실을 밝히며 여론 순화를 꾀하고 있고, 여당도 이례적 사과에 방점을 두며 남북관계 전환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런 흐름을 보며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시간순으로 지난 8일 및 12일 남북 정상 간 서한 교환, 15일 녹화되고 22일 공개된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관련 유엔총회 영상연설, 25일 김정은의 신속한 사과 등 일련의 사실 간에 어떤 공동의 연루 기류가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 즉, 북한으로서는 제재, 코로나19 방역, 홍수 피해 등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내달 10일 당 창건 기념일, 내년 1월 제8차 전당대회 등 정치 행사도 치러야 하는데 남측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정부는 대북 지원을 앞세워 대화의 물꼬를 살리고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을 하려면 이런 돌발적 악재는 서둘러 덮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처참히 살해한 뒤 진정성 없이 한 사과에 감읍해 하는 것은 범죄자 북한에 심리적으로 동조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이다. 사과를 덥석 받고 마무리할 사안이 아니다. 북한의 시신 회수 협조, 철저한 책임 규명과 관련자 처벌, 재발 방지 구두 약속에 대한 수긍할 만한 후속 조치 및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그 첫 조치가 어제 정부가 요구한 공동 조사겠지만, 북한의 거부 입장이 문제다. 또한, 이번 사건은 북한 체제가 존립의 임계상황에 있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정규군이 비무장 민간인을 무참히 살해하는 데서 김정은 체제의 극단적 경직성과 인권 무시, 코로나에 대한 병적 히스테리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쓰러질 운명의 미치광이 정권을 보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9·19 남북 군사합의는 무효화됐다. 북한의 평화 파괴 만행과 북방한계선(NLL)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주장해온 해상분계선을 영해로 고집하는 발표가 그 증거다. 생명 존중, 상호 신뢰와 존중 등 내용을 담은 정상 간 서한도 현실감 없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오히려 5월 31일 김여정이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한 이후 취해온 북한의 적대적 조치들이 불편하지만 적나라한 현실을 담고 있다. 9·19 합의는 우리 안보에 큰 공백을 야기하는 것이었으므로 무용화했다고 아쉬워야 할 이유도 없다.

이번 사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하고 필요한 절차를 밟을 수는 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를 볼 때 그 또한 쉽지 않다. 미국의 미온적 태도도 걸린다. 결국, 우리의 의지와 행동에 달렸다.

지난 23일 문 대통령은 군 장성 진급자에게 삼정검을 수여하며 칼은 칼집 안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언급했다. 우리 속담에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 있으면 찾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동맹 약화, 안보 취약, 대북 저자세 속에서 안보라는 우리 칼은 과연 누구의 칼집에 들어가 있는지 불안과 분노가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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