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방, 20×10㎝, 혼합재료에 먹과채색, 2020
어머니의방, 20×10㎝, 혼합재료에 먹과채색, 2020


■ (46) 파리 노르망디

佛 문단의 지존 앙드레 지드
‘자기만의 방서 나와라’ 주창
세상 떠돌며 다양한 체험 즐겨

엄격한 홀어머니의 교육으로
삶은 반발·외출·귀환의 연속
소설에 빗댄 자전적 이야기
‘좁은문’으로 노벨상 받기도


세상의 모든 아들딸은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싶어 한다. 설사 고향 집을 지키고 있는 아들이라 할지라도 떠나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추석을 앞두고 문득 고향이란 ‘어머니’의 다른 말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욕망 같은 것이다. 여기 평생 마음으로 어머니의 고향 집을 맴돌았던 한 남자가 있다.

프랑스 문단의 지존이라는 앙드레 지드. 세상을 정처 없이 헤맸지만 돌아오는 지점은 매양 어머니의 방이었다. 나는 여행자로 다니다가 뜻밖의 장소에서 지드의 흔적과 마주치곤 했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튀니스 근교 한 바닷가 카페 드 나트(돗자리라는 뜻)에 갔을 때 벽에는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와 함께 지드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종업원이 꺼내놓은 낡은 방명록에는 퇴색된 그의 서명이 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전통카페에 지드가 단골손님으로 왔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오랫동안 굴레가 돼왔던 종교적 인습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양하고도 낯선 체험. 그중에는 동성애까지 있었는데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랐던 그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일탈이었다. 아프리카의 붉은 토양이며 작열하는 태양과 만나면서 그는 비로소 벌거벗은 대지와 인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자의식이 안개처럼 덮인 자신만의 방에서 비로소 걸어 나왔노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의 책 ‘지상의 양식’ 서문에도, 모쪼록 자기 책을 읽는 많은 사람이 처한 곳이 어디가 됐든, 그 특정한 공간과 생각 속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바란다고 쓰여 있다. 성장통을 겪는다고 해도 그렇게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올해 초, 머물던 이탈리아 아말피 코스트의 작은 해안 도시 라벨로의 한적한 마을을 산책하던 때였다. 쇠창살에 거미줄 쳐진 어느 오래된 집 담벼락에 ‘앙드레 지드가 머물며 배덕자를 쓴 곳’이라는 푸른 문자판이 붙어 있었다. 집은 낡았고 문자판은 녹슬어 있었다. 파리를 떠나 그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산꼭대기 마을의 한적한 방 한 칸을 빌려 자신을 유폐해 글 노동을 했던 것이다. 그의 이력 속에는 1902년 무렵 파리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춰 이탈리아 바닷가 산마을로 숨어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라벨로의 산마을을 걷다가 그가 숨어 지냈던 풀 더미 속의 집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바그너가 머물며 곡을 썼다는 훨씬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저택이 근처에 있었지만 지드의 글 감옥은 은밀하고 작은 단독 주택이었다. 부근에는 변변한 식당도 없이 십여 분 거리에 야채가게 하나가 있었을 뿐인데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싶을 정도로 외지고 적막한 곳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는 결국 어머니에게 정신적 귀환을 하게 된다.

세 번째는 노르망디에 가다가 들렀던 숲속의 고성 샹티이인데 엄청난 미술품을 컬렉션으로 두고 있는 이 숲속의 성에도 지드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력을 보니 그는 노르망디의 시장까지 지냈단다. 그뿐만 아니라 25년 동안이나 별거했던 아내 역시 노르망디의 한 작은 마을에 따로 머물다가 생을 마쳤다. 흔히들 앙드레 지드 하면 프랑스의 문화 권력이라고 할 만큼 문인과 독자층 양쪽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또 그는 가장 날카로운 눈을 가진 비평가이기도 했는데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외국 문학에까지 비평적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힘은 왕성한 저술에서 나왔다. 시·소설·희곡·비평 등 전방위로 글을 썼고 그의 뒤에는 백만 독자가 있었다. 평생을 독신과 같은 결혼을 유지하며 엄청난 양의 작품을 쏟아냈고 출간 때마다 비난과 갈채의 가운데로 걸어가곤 했지만 오불관언이었고 마침내 젊은 날 쓴 ‘좁은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문학의 위인은 그 속에 자라지 않은 ‘어른아이’가 있었다. 엄격한 어머니의 프로테스탄트 교육에 대한 반발의 외출과 돌아옴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전적 이야기를 부지런히 소설의 형식 속에 담아냈던 것이다.

허다한 문학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 앙드레 지드와 헤르만 헤세라는 두 문을 통과해야 했다. 특히 ‘좁은문’을 읽으며 나는 작가가 육친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는열한 살 때 아버지와 사별한 후 그야말로 독실한 외골수 프로테스탄트였던 홀어머니 아래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교육을 받았는데 나 역시 만 열한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 잡혀 교회에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육체적 욕망의 자아와 청교도적 삶의 가르침 속에서 방황하던 ‘좁은문’의 제롬과 알리사는 우리 시대 젊은이의 초상이기도 했고 동시에 동방의 시골 소년이었던 나의 초상이기도 했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가천대 석좌교수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가천대 석좌교수
외삼촌의 딸인 알리사와 그 옛날 교회에서 들었던 마태복음 설교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명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는 성경의 말씀. 그 구절은 평생에 걸쳐 지드의 문학적 딜레마와 족쇄의 알고리즘이 된다.

인습의 방에서 나와라, 그리하여 떠나라고 선동했던 지드는 ‘좁은문’의 제롬과 다른 이름의 다중 인격이었다. 사랑하는 연상의 사촌 누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 되기를 원했지만 ‘좁은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상의 육(肉)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영(靈)적인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고뇌에 시달렸다.

‘배덕자’에 이르러 그의 방향 없는 저항은 절정에 이르지만 ‘돌아온 탕자’나 ‘한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 ‘사울’ 같은 작품에 이르면 “주님 손 들고 옵니다”와 같은 자기 포기적 신앙고백이 담겨 있다.

결국 헤매고 헤매다 어머니의 성경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소년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일기를 쓰며 자아와 세계의 갈등을 기술했던 것(나중 ‘일기 1939-1950’으로 출간된다)도 수많은 질문과 회의를 처리할 가상 공간이 필요했던 까닭으로 보인다.

그는 ‘좁은문’에서처럼 사촌 누이와 결혼하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율법을 비좁게 해석한 알리사 때문에 평생 동침하지 않은 기이한 백색(白色)결혼이었다. 두 사람은 종교적 도덕률과 육체적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던 10대 때의 그 고뇌의 덫을 결국 평생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앙드레 지드(1869∼1951)
앙드레 지드(1869∼1951)

그런 면에서 지드의 거의 모든 작품은 자신이 열세 살부터 쓰기 시작했던 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자전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가 “‘사전꾼들(Les Faux-Monnayeurs)’만이 나의 유일한 소설”이라고 불렀던 것도 다른 모든 작품이 자신의 자의식적 일기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아이의 일기장인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 ‘좁은문’에서 어른의 일기장인 ‘지상의 양식’ ‘한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 ‘사울’로 그 제목만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뛰쳐나왔던 어린 시절의 그 어머니 방으로 지친 노인이 돼 다시 돌아갔던 것이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앙드레 지드(1869∼1951)의 문학세계

프랑스의 도스토옙스키라고 불리는 앙드레 지드는 청년 시절 쓴 ‘좁은문’으로 수십 년 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강조한 어머니 밑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연상의 사촌 누이를 사랑한 최초의 자전소설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에서 ‘좁은문’ ‘지상의 양식’ ‘콩고기행’ ‘교황청의 지하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사와 문학적 실험을 거듭했고 극작가, 평론가, 출판사 주간 등을 지내며 전방위적 문화업적을 낳았다. 진정한 프랑스 현대문학의 문을 연 작가로 평가받는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