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리 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꿈이다. 평생 이사도 가지 않을 아파트 작업실도 가격이 많이 올라 과다한 세금 통지서를 받았을 때, 이건 꿈이겠지 싶었다. 사는 집과 바로 붙은 아파트를 사서 작업실로 쓰는 까닭에 전업 화가인 나로선 피할 수 없는 1가구 2주택자다. 작업실을 팔고 남의 건물에 세 들어 그림을 그려야만 할까? 짐이 너무 많아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면 속수무책일 텐데…. 이런 상상들도 다 꿈만 같다. 마스크를 쓰고 날씨 좋은 가을날을 걸을 때도 이게 꿈이란 생각을 한다. 며칠 전엔, 강도가 들어 방금 완성된 내 그림을 칼로 찢어 버리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꿈을 꿨다. 꿈을 깬 뒤에도 꿈속에서 내가 한 말이 똑똑히 기억났다. “다 찢어 버려! 나도 확 죽고 싶은 사람이야.” 강도는 놀라서 도망갔고, 나는 꿈에서 깨어 그림이 멀쩡한지 확인했다. 요즘은 진짜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다.

지난 11일 아침, 조카로부터 오빠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게 꿈이지 싶었다. 어머니가 친자식처럼 기른, 나와 배다른 오누이 간인 오빠는 다정하고 공부도 너무 잘했다. 그림도 잘 그리고 만화를 잘 그려서 고바우 만화를 복사한 듯 그리곤 했다. 가을날엔 어린 나를 데리고 고궁에 가서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가을 하늘은 푸르렀고, 돌아오는 길엔 안국동 우표 가게에서 내가 좋아하는 우표를 사주었다. 오빠가 군대에 갔을 때는 멋지고 다정한 글씨가 쓰인 편지를 매일 기다렸고, 지금도 ‘오빠 생각’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짠해진다.

이런저런 이유로 최근엔 멀어진 지 오래됐고, 세상 떠난 그날따라 가을비가 와서 더욱 슬펐다. 장지의 가족묘에서 몇 년 전 세상 떠난 동생 옆에 오빠의 유골 단지를 넣었다. 이른 나이에 형제를 둘이나 잃은 나는 이 장면도 꿈이지 싶었다. 하긴, 삶이라는 것도 긴 꿈과 다를 게 뭔가.

잠결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 해상에서 북한군의 총격을 받아 숨지고 시신은 불태워졌다는 뉴스를 들을 때도 이게 꿈이지 싶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한민국 공무원이 아무리 빚이 많고 불행하다 해도 월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북한으로 가는 두렵고 낯선 길을 택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대체 있기나 할까? 요즘 나쁜 일을 대하면 이게 꿈이라서 곧 깰 것이라고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중이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마스크를 쓰고 걸어가는 거리 풍경도, 공상과학 영화 속처럼 거대한 영화관에서 체온을 재고 QR코드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을 때도, 친구와 함께 가도 한 자리씩 뚝 떨어져 앉아 썰렁하게 영화를 보는 극장 안의 풍경도, 너무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가슴 아픈 남북한의 동족상잔(同族相殘)도 다 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비행기를 타고 기내식을 먹으며 여행을 하는 상상을 하면서 하늘 위에 잠시 떠 있다가 착륙하는 가상 해외여행 상품이 인기라니 그것도 꿈만 같다. 그만큼 삶과 꿈의 거리는 가까운지 모른다. 세상의 여행길이 꽉 막혀 버린 소극적인 전쟁 상태에 살면서, 살다 보면 이렇게 나쁜 꿈만 꾸지는 않을 것이라 희망한다.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길몽도 분명히 꾸게 될 거라고.

올가을도 둘이 조촐하게 추석을 보내며, 나쁜 꿈을 좀 오래 꾸는 것이라고 어머니께 말하리라. 내년 추석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참 날씨 좋네” 하며 거리를 걸을 수 있을 거라고. 그때쯤이면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시간을 조금은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아들 둘은 좋은 곳에서 잘 지내니, 부디 백 세까지 건강하시라고.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