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문화부장

오랫동안 영웅이라면 헤라클레스나 오디세우스 혹은 알렉산더 대왕 정도는 돼야 했다. 신의 아들·왕족 같은 고귀한 신분, 육체적 강인함, 뛰어난 지략에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제국을 건설하는 수준의 업적을 남겨야 했다. 이들 영웅은 시대 변화에 따라 바뀌었다. 냉전 시기엔 007 제임스 본드가 등장했고, 보다 인간적인 영웅 스파이더맨이 인기를 얻더니 트랜스휴먼 시대를 예고하듯 최첨단 하이테크 슈트를 장착한 일종의 사이보그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이 열광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고전 영웅들이 한 번의 실수로 치명타를 입는 데 비해 현대 히어로들은 실수도 하고, 정신적으로 미숙한 인간적 캐릭터로 변했지만 그 역할에선 고전 영웅과 다르지 않았다. 악(적)의 무리에 대항해 전 세계를, 전 우주를 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대, 이야기 세계에서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는 한발 물러서게 됐다. 전 세계는 국경을 닫고 국가별로 쪼개졌으며 무엇보다 악의 무리는 다름 아닌 지금의 위기를 만든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 세상을 떠난 토니 스타크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지금 세상과 우리를 구할 수 없다. 이런 기존 영웅들의 퇴각 속에 새로운 히어로가 등장했다.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나타난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정세랑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옮긴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지난달 공개된 뒤 넷플릭스 한국 TOP 콘텐츠 1위까지 오르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상상력 터지는 신선함’이라는 호평과 ‘서사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함께 듣고 있지만 안은영 캐릭터가 보여주는 ‘시대의 마음’은 분명하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욕망의 찌꺼기 ‘젤리’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안은영은 부임한 고등학교에서 동료 교사 홍인표와 함께 미스터리한 일들을 해결해나간다. 일단 ‘여성 히어로’다. 여성 히어로라면 마블 역사상 첫 여성 단독 히어로 캡틴 마블이 나왔을 정도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캡틴 마블이 상대를 우주로 날려 보낼 정도로 남성 히어로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데 비해 안은영은 특별나지도 사명감에 불타지도 않는다. 세계와 우주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운명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이 불완전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자기 일상의 터전인 학교와 학생들을 구하고 스스로 성장해간다.

작은 존재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큰 힘. 정치부터 일상까지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소명이 아닐까 한다. 문화일보가 지난주부터 시작한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새로운 일상의 탄생’도 바로 자신에서 출발해 세상을 성찰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연재이다. 이 기획에 우치다 다쓰루(內田樹) 고베여대 명예교수는 이런 글을 보내왔다. “‘나는 정말 무엇을 하고 싶었던가’라고 자문하며 ‘소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만 명, 수십만 명씩 있다면, 세상은 기분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코로나를 기회로 자기 삶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며 ‘소명’의 목소리를 찾아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이 역병에도 조금은 ‘이로운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자리에서 소명을 다 하는 존재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영웅 안은영이 반갑다.
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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