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서 망자는 말이 없으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특히, 생명권은 국가가 국민에게 보장해야 하는 최우선 권리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대통령의 저서처럼 말이다. 생명권 보장에 실패했으면 원인이라도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 사망에 대한 정확한 진상 조사도 없이 사건을 ‘월북 프레임’에 꿰맞춰 조기 종결하려는 행태는 없어야 한다.
국방부와 해경 등이 북한군에 사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 씨를 ‘월북자’로 단정한 근거는 부실하고 취약하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지난 7일 국정감사에서 이 씨 실종이 확인된 지난달 21일 오후 실무진으로부터 “월북일 가능성이 낮다, 없다 이렇게 보고를 받았다”고 답변했다. 이 씨는 22일 실종 지점에서 33㎞ 이상 떨어진 북측 해역에서 발견돼 북한군에게 사살, 소각까지 됐다. 소각 확인 직후 소집된 긴급 관계 장관회의는 23일 새벽에야 열렸다. 비슷한 시각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화상연설이 진행됐다. 문 대통령에게는 오전 8시30분에야 총살·소각 상황이 보고됐다고 한다. ‘47시간, 국가는 무얼 했나’ 하는 문제 제기는 당연하다.
도대체 그날 밤 청와대에서 무슨 논의가 있었던지 ‘실종’에서 ‘월북’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피살자에 대한 월북 프레임이 대북 비난의 수위를 조절하기가 쉬웠던 것일까? 국민의 대북 정서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전략인가? 마주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보다는 쉽고 간편한 정무적 판단을 우선시한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국방부는 이 씨가 구명조끼를 착용한 점, 슬리퍼를 배 위에 나란히 벗어둔 점, 조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점 등 4가지 이유를 들었다. 해경도 북측이 이 씨 본인의 이름·나이·고향·키 등 신상 정보를 알고 있고, 월북 의사를 표명한 것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무궁화 10호’ 수색 결과 평소 이 씨의 안전화가 없었다고 한다. 슬리퍼를 신고 어업지도선에 오르는 공무원은 없다. 실족(失足)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군의 초기 판단처럼 해류를 잘 아는 이 씨가 굳이 역류해 33㎞를 갔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북한 선박에 “살려 달라”는 구조 요청을 하며 자신의 신상을 얘기한 것을 월북 의사를 밝혔다고 보기 어렵다. 북한군의 사살 지시를 입증하는 감청 정보도 있다고 한다. 군은 물론 북한조차 표류자가 발생했을 때 통상 하는 국제상선통신망을 이용한 구조요청을 하는데 그것조차도 안 했다.
어느새 ‘북한군이 사살·소각한 사건’에서 ‘서해상 (우리 국민) 사망사건’으로 용어가 바뀌면서 사살 주체이자 범죄인인 북한군은 사라졌다. 여권은 구체적인 사안은 정보자산이 노출된다며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다. 인사처장은 국회에서 월북이면 순직 처리가 어렵다는 등 월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무방비 상태의 자국민이 상대방의 무자비한 총격에 목숨을 잃는 사건은 여야 정치권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정쟁의 대상이 아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해적들보다 더한 만행의 주체들이 호시탐탐 침범하는 불안한 경계지대다. 작금의 사태가 시간이 지나고 흐지부지될 경우 유사한 인명 피해가 재발할 것은 불문가지다. 아마도 미군들은 고도의 감시 장비로 이번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자국민 피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행보를 말없이 지켜볼 것이다. 국정 책임자들은 ‘종전선언’이니 ‘평화 프로세스’라는 메아리 없는 거창한 담론보다 자국민의 안전과 보호가 우선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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