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 고정순 그림책 | 만만한책방

이 그림책의 제목은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다. 처음부터 독자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도록 단단히 이르고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라니 평범하다 못해 조용하고, ‘늙은’이라니 당연히 힘이 없고, 늑대도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아닌 ‘산양’이라니 마지막 포효를 기대할 것도 없어 보인다.

이러한 예상은 책을 읽는 동안 툭툭 무너진다. 젊은 날 멋졌지만 이제는 지팡이 없이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늙은 산양이 그 지팡이조차 자꾸만 떨어뜨리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죽음의 예감에도 단계가 있어서 너스레가 가능할 때와 확실히 가까이 왔다는 실감을 느낄 때는 그 충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더 이상 무엇의 중심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마음이 남은 힘조차 모조리 내려놓게 만든다는 것이다.

작가는 마치 그 절망을 아는 사람처럼 산양을 그림책의 끄트머리로 밀어낸다. 몇 장을 넘겨도 산양은 책의 가장자리에만 있다. 지팡이를 줍고 또 주우면서 그는 말한다. “혹시 죽을 날이 가까웠나?”

고정순 작가는 이 질문에 직면한 장면에서만 늙은 산양을 정중앙에 가득 채워 그린다. 아무리 노쇠했다고 해도 죽음을 묻는 순간만큼은 똑같이 소중하고 무거운 한 존재의 필연적인 존재감을 그렇게 보여준다. 그리고 늙은 산양은 무력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용감한 실존적 결단을 내린다. 끝나는 날까지 분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난 곧 죽게 될 거야. 하지만 가만히 앉아 죽을 순 없지”라는 그의 말은 한계 상황에서도 바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시시포스의 외침처럼 결연하다. 그는 멋진 죽음을 맞이할 장소를 찾아 최후의 모험을 떠난다.

반전은 여기서부터 벌어진다. 늙은 산양의 분투가 마지막 폭죽이 터지듯이 멋있었다면 독자들은 쇼를 보고 나온 것처럼 개운한 감동을 느끼며 영웅을 보내듯 그를 홀가분하게 잊었을 것이다. 그런데 멋진 최후는 없다. 망설임과 두려움은 생명의 끝까지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는 어느 평온한 곳에서 고요히 숨을 거둔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생명의 존귀함을 말하는 데는 여러 방식이 있다. 고 작가는 하나의 역설적 사례를 보여준다. 자신에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한없이 젊음을 과신하려 드는 어른들과 죽음은 아직 뭔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 산양의 도전과 애처로운 실패를 가장 신실하게 슬퍼할지도 모르는 어린이 중에 누구에게 이 그림책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작가는 이 작품의 속표지 곁에 ‘나에게’라고 적어두었다. 책을 읽는 모든 ‘나’를 의미한다면 아마도 그 말이 정답인 것 같다. 48쪽, 1만4000원.

김지은 서울예대 교수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