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릉이 타는 동네 주치의’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은 원래 도시공학자를 꿈꾸며 1996년 서울대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인생이 180도로 바뀌게 된 것은 1학년 겨울방학 때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에 참여하면서부터다. 1995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된 직후라 상담소에 일은 쏟아지는데 활동가는 많지 않고, 다른 전문 상담소도 턱없이 부족한 때였다. 당시 과로에 시달리며 열정적으로 일하던 활동가들이 “성폭력 피해자 입장에서 진료해 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 것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추 원장은 결국 진로를 변경해 이듬해 같은 대학 의과대학에 다시 들어갔다.
“지금은 해바라기센터와 같은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전문 보호기관들이 전국에서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증거를 모으고 법정에서 증언해줄 의사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나라도 의대에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죠.”
추 원장은 잠시 법의학 분야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결국 더 적성에 맞는다고 판단한 응급의학과와 가정의학과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했다. 학창 시절 공부깨나 한 의대생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것은 흥미롭게도 재미로 본 사주였다.
“당시 사주를 보던 분이 흥미진진하게 살려면 응급의학과를 하고, 주변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싶으면 가정의학과를 가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결국 가정의학과를 선택했어요.”
추 원장은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에서 수련받았다. 이곳에서 여러 전문 과를 넘나드는 지식과 환자의 삶을 통합적으로 파악하는 태도 등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한다. 꾸준히 여성단체 활동도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주의와 의료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다 건강한 삶의 토대가 되는 의료협동조합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결국 여성단체에서 만난 지인과 함께 2012년 서울 은평구에 살림의원의 문을 열었다.
최준영 기자 cjy324@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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