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떠난 이를 기린 ‘흰 상복(喪服)’이 남은 이들에게 여운을 주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장례식 때 부인과 두 딸이 입은 하얀 옷이 우리 전통 상복 의례에 따른 것이라고 해서다.
요즘 검은 상복이 주류를 이루는데, 일본 상복 문화 영향이라고 한다. 그것이 이번 장례를 통해 새삼 알려졌다. 30, 40년 전 상조 회사가 일본에서 들어오면서 검은 상복 문화가 퍼졌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흔히 검은 상복을 입기 때문에 일본 상례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사회에 굳어진 측면이 있는 듯싶다.
정갈한 복장으로 진심으로 가신 이를 추모한다면,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일본 상례보다는 우리 전통에 가깝게 치르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이번에 일본 언론들이 강조했듯 이 회장은 생전에 일본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는 그 배움을 통해 자신을 단련해 일본 일류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속에 삼성을 우뚝 세웠다. 기업 영역에서 이른바 극일(克日)을 이룬 셈이다. 그런 그의 장례에서 일본식 검은 상복이 아닌 우리 전통의 흰 상복이 등장한 것은, 울림이 작지 않다. 목청껏 반일을 부르짖지 않아도 실력을 쌓고, 정체성을 차분히 되살리는 일을 하면 된다는 상징 같아서다.
구한말의 항일 죽창가를 21세기에 불러대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국민감정을 자극해서 정치진영 이익 얻기에 골몰했지 우리 문화 정체성을 되살리기 위해 그들이 과연 어떤 일을 했나.
이번에 상복을 만든 디자이너는 이 회장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뜻에 따라 전통 상복 색으로 했다고 전했다. 홍 전 관장은 우리 전통문화 유산을 보살피는 재단법인 ‘아름지기’에 참여해왔다. 그의 올케인 신연균 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아름지기는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대기업 회장 부인들이 참여했다는 이유로 ‘재벌가 사모님들의 사교 모임’이라는 비판이 자주 불거졌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러운 행보를 하면서도 전통의 보존과 현대적 계승이라는 화두를 꾸준히 실천해왔다. 궁궐 잡초를 뽑고 창틀의 먼지를 털어내며 전각을 정비하는 일부터 한옥 문화를 오늘에 살리는 전시, 교육까지 각종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역시 기업 가(家) 여성들이 참여한 비영리법인 ‘예올’도 옛 문화유산을 오늘에 올바르게 전하자는 운동을 펼쳐왔다. 19년 전 창립한 예올은 허광구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부인인 김녕자 씨가 초대 이사장이었다. 지금은 그 동생이자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부인인 김영명 씨가 이사장으로 일한다. 문화재 안내판을 가꾸는 일부터 울산 반구대 암각화 보존, 사직단 복원 및 정비 등에 앞장서왔다. 국내 거주 외국인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는 영어 렉처 등도 진행했다. 근년에는 공예 장인 후원에도 힘쓰고 있다.
아름지기와 예올의 활동은 문화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만, 비뚜름한 시각도 여전하다. ‘있는 집안의 문화 후원 생색내기’라는 것이다. 이런 시선이 불편하겠으나 내실을 기하는 약으로 삼고, 오래 지속하기를 바란다. 글로벌 시대일수록 우리 전통의 정수를 되살려내야 한다. 그래야 세계로부터 진짜 존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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