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균 작가가 자신의 작품 ‘나의 은하수 1’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나희균 작가가 자신의 작품 ‘나의 은하수 1’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김환기와 교감 나눴던 88세 나희균, 화업 70년 특별전

최초 서양화가 나혜석이 고모
파리유학때 김환기 부부 만나
1950년대 유럽 화단서 활약
국내 첫 네온관 작품 선뵈기도
2000년대부턴 음률연작 그려

회화·금속입체 등 150여점
환기미술관서 내달까지 전시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수화가 만난 사람들- 나희균, 고요의 빛’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수화 김환기(1913∼1974)와 깊은 인연이 있는 작가를 선정해 여는 특별전의 하나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나희균 작가의 70년 창작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드로잉, 회화, 네온, 금속 입체 작품 등 150여 점을 내달 말까지 선보인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21일, 나희균 작가는 약속 시간보다 30여 분 일찍 나타났다. 조쌀한 얼굴에 단정한 성품이 묻어났다. 88세의 그는 듣는 귀가 어둡다고 했으나, 대화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신앙생활과 함께 평소 걱정을 잘하지 않는 성격이 건강에 도움이 된 듯싶다고 했다. 서울에서 지내며 1주일에 절반쯤 경기 양주 안상철미술관에 있는 작업실을 가는데, 거기서 나무와 꽃을 만나는 게 좋다며 미소 지었다. 안상철미술관은 나 작가의 서울 미대 동기이자 남편이었던 한국화가 안상철(1927∼1993)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건축가 안우성 씨가 설계해 지은 것이다.

1957년 프랑스 파리 베즐레 성당 앞에서 나희균(앞줄 왼쪽)이 김환기(뒤쪽)-김향안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  환기미술관 제공
1957년 프랑스 파리 베즐레 성당 앞에서 나희균(앞줄 왼쪽)이 김환기(뒤쪽)-김향안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 환기미술관 제공

“결혼 후 10년 정도 작품 활동을 못했어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 다시 했는데, 그 시절에 고생한 게 사실이지만 전혀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전쟁을 두 번(태평양전쟁과 6·25전쟁) 겪은 세대잖아요.”

그는 전쟁 직후인 1955년 프랑스 파리 유학을 감행했다. 거기서 김환기-김향안 부부를 만나 교우한 것은 행운이었다. 이번 전시장에는 김환기가 후배인 나희균을 격려하는 편지가 소개돼 있다. “…초조해 말고 재주 부리려 말고,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일을 해요. 희균이한테는 좋은 것이 있어. 성격은 참한 것 같은데 그림은 거칠거든.…”

김환기는 나희균이 차분한 성격이면서도 예술에 있어서는 과감한 실험으로 개성적 세계를 가꾸는 작가임을 간파한 것이다. 나 작가는 1957년 파리 베네지트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유럽 화단에서 활동한 한국 여성 예술가는 드물었다. 그는 귀국 후 1960년대 기하학적이고 평면적인 조형기호로 구성한 작품을 주로 만들었다. 1970년대엔 한국에서 최초로 네온관을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평면에서 벗어나 입체 작품을 만들고픈 욕구로 PVC파이프 등의 산업용 소재를 활용했다. 1990년대엔 무수히 빛나는 별무리를 통해 우주 공간의 영성(靈性)을 드러내는 평면 작업을 했고, 2000년대부터는 글씨 연작, 음률(音律) 연작 등을 만들어왔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 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나 작가는 “음악가들이 풍경을 음률로 만들듯이 나는 음악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의도는 음률 연작에 잘 표현돼 있지만, 다른 작품들도 내재율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스스로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꼽은 ‘고요 1’을 보면, 자연의 고요함을 물결로 표현하며 그 속에 음률을 담아놨다. 그 율격의 흐름은 보고 듣는 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그림은 보는 이가 마음대로 느끼면 된다”고 했다.

그는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로 불리는 나혜석(1896∼1948)의 조카다. 그러니까 배우 나문희에게는 고모뻘이다. 나혜석에 관한 기억은 1946년,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모가) 저희 집에 찾아오셨는데 중풍에 걸려서 몸을 떨었어요. 어머니가 뒷방에 모셨는데, 아버지는 화를 내며 나가라고 했어요. 여동생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이혼한 후 잘 살지 못하니까…. (고모가) 한곳에 계시면 좋은데 마음이 불안한지 그러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청운동 양로원에 모시려 했으나, 거기 계시지 못하고 결국 행려자로 사망하셨지요.”

그는 어렵게 말을 마친 후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과 불화한 고모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잡지에 쓴 글 ‘시대를 앞서간 여인, 나혜석’ 사본을 전해줬다.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여성에게 짊어지게 하는 가사노동과 시간의 소모를 줄여보려고 문필을 통하여 끊임없이 생활개선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여성의 의식이 깨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나 작가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요즘 주목받고 있는 박래현(1920∼1976) 작가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사람은 고유의 정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작품에 나타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우러난다고 하셨지요.”

그는 작품을 더 만들고 싶지만, “정신이 빈곤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환기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3일 전까지 그리셨는데, 그만큼 시(詩) 정신이 충만하셨기에 가능했을 거예요. 저는 머리가 가난해서…, 하하.”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장재선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