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맛이 갔어.” 미간을 찌푸리며 농부가 오래된 우유를 모조리 내다버렸다면 세상에 요구르트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싱어게인’(JTBC)은 이를테면 발효유 같은 프로그램이다. ‘세상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재야의 실력자, 한땐 잘나갔지만 지금은 잊힌 비운의 가수’를 무대에 소환한다. “노래는 수준급이고 얼굴도 예전에 본 것 같은데 이름은 모르겠네.” 출연 자격 자체가 ‘알 듯 말 듯’ ‘본 듯 만 듯’이니 제작진도 기획단계에서 이 프로 ‘될 듯 말 듯’ 조마조마했으리라.

초조하고 긴장하는 건 출연자(71팀)뿐만 아니다. 한쪽은 사느냐, 죽느냐, 다른 한쪽은 살리느냐 죽이느냐. 절박한 자들 앞에서 심사위원들(8명)이 오히려 죽을 맛이다. 프로그램 성격상 모두를 살릴 순 없기 때문이다. 버튼 하나로 저 가수가 부활할 수도 있고 영구 퇴장당할 수도 있다니. 누를까 말까 사이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동정심이 많아도 곤란하고 의리가 남달라도 난처하다.

주철환 프로듀서·작가·노래채집가
주철환 프로듀서·작가·노래채집가
드디어 막이 올랐다. 이름 대신 번호가 주어지는데 순서대로 1호부터 등장하는 게 아니다. 심사위원이 누르는 버튼 이름이 ‘어게인’인데 전원에게 ‘다시 한 번’을 요청받은 첫 번째 가수는 26호였다. 감히 말하자면 그가 그 무대에서 부른 노래가 이 프로그램 전체의 기획의도를 살려주었다. ‘여러 갈래 길 중 만약에 이 길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돌아서 갈 수밖에 없는 꼬부라진 길일지라도/ 딱딱해지는 발바닥 걸어 걸어 걸어가다 보면/ 저 넓은 꽃밭에 누워서 난 쉴 수 있겠지’. 강산에(사진)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다.

‘불후의 명곡’(KBS 2TV)에 전설로 나오는 가수들에겐 저마다 수식어가 붙는다. 강산에가 출연(2019년 5월 18일)했을 때 무대 전광판에는 ‘시대를 위로하는 가객’이라는 글자가 붙었다. 그의 본명은 강영걸. 영웅호걸의 준말(영걸) 대신 처음엔 사내라는 예명을 썼다. ‘미련 같은 건 없다/ 후회 역시도 없다/ 사내답게 살다가 사내답게 갈 거다’(나훈아 ‘사내’ 중). 그런데 누군가 강사내를 강산에로 잘못 썼다. 화를 내는 대신에 예명을 바꿔버렸다. ‘강한 사나이’보다는 강산(江山)에 뛰노는 노루가 더 멋있다고 느낀 걸까. 잘못 들어간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처럼 그는 자신이 심은 나무들로 작은 산을 만들어 갔다.

오래전에 강산에의 콘서트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공연 끄트머리에 멋진 말로 마무리하던 기억이 난다. “저를 제외한 세상 사람 모두 나비죠. 그러니까 여러분도 다 나비인 거예요. 그럼 저는 뭐죠? 전 애벌레죠. 불쌍해하지 마십시오. 저도 실은 나비가 되길 꿈꾼답니다.” 이쯤에서 노래 하나가 퍼뜩 날아오르지 않는가.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앞길도 보이지 않아/ 나는 아주 작은 애벌레/ 살이 터져 허물 벗어 한 번 두 번 다시/ 나는 상처 많은 번데기.’ YB(윤도현 밴드)의 ‘나는 나비’ 가사인데 강산에가 이 노래에서 감명을 받은 걸까, 아니면 YB가 강산에로부터 영감을 얻은 걸까. 솔직히 어느 게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의 노래에 공통으로 들어간 단어 ‘다시’를 주목한다. ‘그래 다시 가다 보면/ 걸어 걸어 걸어가다 보면/ 어느 날 그 모든 일들을 감사해 하겠지.’

‘행복어사전’에서는 ‘가장’ ‘제일’보다 빈도수 높은 부사가 ‘다시’다. 강산에의 희망 노래에서도 중심을 차지하는 단어는 ‘다시’(again)다. ‘어려워 마/ 두려워 마/ 아무것도 아니야/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생각해 보는 거야/ 세상이 너를 무릎 꿇게 하여도/ 당당히 네 꿈을 펼쳐 보여줘’(‘넌 할 수 있어’ 중). ‘이제 난 끝났어’라고 말하는 그대에게 요구르트 한 잔과 함께 ‘마지막’이라는 3행시(자작시)를 선물한다. ‘마음먹기 달렸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막을 올려라.’

프로듀서
작가·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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