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적 단어였던 ‘블루’
코로나로 산산이 깨어져
슬프고 우울한 시절에도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중요
공포 속에 한 해 보내지만
희망의 끈은 놓치지 말자
‘블루’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초딩 시절이다. 동네 형을 따라간 극장에서였다. ‘솔저 블루’라는 서부영화. 말이 서부영화이지 이 영화는 상당히 사회성을 띠고 있다. 그때는 ‘블루’란 말이 슬픔 또는 우울이라는 의미임을 몰랐었다. 그저 인디언을 죽이는 기병대가 나팔 소리에 맞춰 나올 때 박수 치며 좋아했던 기억만 있다. 훗날 TV를 통해 다시 보면서 이 영화가 앙가주망 영화로, 미 기병대를 악(惡)으로 묘사해 미국 사회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캔디스 버건이 나온다. 그날 유식한 동네 형은 ‘우울한 군인’이라며 나름 ‘솔저 블루’의 뜻을 설명해 줬다. 그런데 그 설명이 엉터리임을 커서 알았다.
대학에 입학한 그해 또 다른 ‘블루’를 만났다. 영국의 록그룹인 ELO(Electric Light Orchestra)가 발표한 ‘미드나이트 블루’라는 팝 덕분이다. ‘미드나이트’란 묘한 단어 때문에 노래는 갓 스물을 넘긴 나의 밤을 지배했다.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연인들의 한밤의 슬픔을 담았다. 그래서 ‘블루’라는 말을 낭만적이고 멋있는 단어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내게 매력적이었던 말 ‘블루’는 코로나19로 산산이 깨졌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니. ‘블루’는 이제 일상 언어다. 연말의 들뜬 기분은 간곳없다. 송년 약속들은 하나같이 취소된다. 감염에 대한 잠재적 위험으로 주위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 바이러스 하나가 일상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음을 실감한다. 불량국가 중국의 허접한 세균 관리 탓이다.
코로나는 이제 ‘블루’를 지나 공포에 가깝다. 일본에서는 정작 코로나 사망자보다 코로나 블루 사망자가 더 많았다. 지난달까지 코로나 누적 사망자가 2139명인 데 비해 코로나 블루로 자살한 사람은 2153명으로 집계됐다. 충격적이다. 사태의 장기화에 따른 외로움, 실직 등이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상상 속에만 있던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현실이 된 것이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영화가 보여주던 경고가 허구적 상상이 아닌, 예언적 메시지였음도 실감하게 된다.
이즈음 가장 생각나는 영화가 ‘더 로드(THE ROAD)’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맥 매카시의 퓰리처상 수상작을 영화화했다. 국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인류 멸망의 끔찍한 공포를 보여준다. ‘더 로드’의 세계는 잿빛 폐허의 세계다. 그곳은 원인 불명의 재앙으로 인류는 몰사하고 모든 게 잿더미로 변했다. 나무들은 불탔고, 태양이 뜨지 않아 언제나 춥다.
영화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아 생존에 몸부림치는 부자(父子)의 고단한 여정을 리얼하게 그린다. 처절하다. 먹을 것이 없자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는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옥 같은 땅 위에서 아버지와 아들 둘이 걷는다. 목적지는 남쪽이고 이들은 불을 운반한다. 왜 남쪽으로 가야 하는지, 그 불이 어떤 불인지 영화는 친절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황폐했던 기억만 가지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우리가 사는 게 좋지 않니?” 아들은 아버지에게 되묻는다.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가 답한다. “글쎄, 나는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여기 있잖아.”
이들이 주고받는 말은 세상이 완벽한 절망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부자는 따뜻한 남쪽, 생명의 시원인 바다를 찾아 끝없이 걷는다. 아버지는 바닷가에서 죽고, 아들은 다른 가족을 만난다. 아들은 그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요?” 개를 데리고 있는, 인육을 먹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다. 처참한 세월을 견디면서도 인간의 이성을, 꿈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다. 아들은 그들과 합류한다. 아버지가 말한 ‘불씨’는 아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여기 있다는 것,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공포 속에 올 한 해도 저물고 있다. 해가 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성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시대에 뒤떨어지고 또 무언가 중요한 걸 하나씩 잃어버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눈은 침침해지고, 호기롭게 대여섯 잔을 사양 않던 폭탄주는 한두 잔에 손사래를 친다. 아이들은 성큼성큼 크고 세상의 아버지들은 스스로 늙어 간다. 세월이 헛헛하게 흐르고, 사내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스스로 산타가 된다.
12월이다. 마음은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있는데 세월은 어김없이 우리를 한 해의 끝자락에 야멸차게 세워두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미련과 안타까움이 많았던 올 한 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한 해를 보낼 채비를 서둘러야 한다. 프로스트는 ‘잠들기 전에 가야만 할 먼 길이 있다(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며 고단한 생의 영속성을 얘기했다. 2020년 12월, 절망의 겨울 속에서도 희망의 끈은 놓치지 말아야겠다. 아듀 2020!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