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디자인 철학이 엿보이는 와인 오프너 ‘안나 G’의 모습. 멘디니가 인테리어를 큐레이팅한 이탈리아 베로나의 비블로스 호텔 앞에서 마치 한 여성이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디자인 철학이 엿보이는 와인 오프너 ‘안나 G’의 모습. 멘디니가 인테리어를 큐레이팅한 이탈리아 베로나의 비블로스 호텔 앞에서 마치 한 여성이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최경원의 세상을 바꾼 디자인 - (1) 알레산드로 멘디니

대표작인 와인 오프너 ‘안나 G’… 정답고 따뜻한 느낌으로 ‘높은 단계의 욕구’충족
1978년 古가구 하나 구입해 점묘법으로 완성한 ‘프루스트 의자’ 지금까지 스테디셀러


이탈리아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의 디자인 중에는 단발머리 여자 인형같이 생긴 것이 있다. 수더분한 얼굴을 하고 있고 때로 두 팔을 높여 만세를 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모습이 크게 아름답거나 예쁘지는 않지만 좀 어설퍼 보여서 누구나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게 만든다. 문제는 그게 와인 오프너라는 것이다.

1993년에 멘디니는 ‘안나(Anna) G’라는 와인 오프너를 세상에 내놓는다. 와인 오프너를 원피스 차림의 여자 모양으로 디자인한 것도 희한한 일이었지만 사람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그것도 자기 여자 친구의 이름을…. 그런데 이 안나 G는 어찌 된 일인지 출시되자마자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다. 한때 1년에 1000만 개가 판매됐다는 말이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기가 식지 않아 이탈리아 주방용품회사 알레시(Alessi)의 대표 상품이 됐으며, 멘디니의 대표작이 됐다. 어떻게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관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하다.

안나 G를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장난감이나 캐릭터 상품처럼 보이지만, 이전의 디자인이 갖지 못했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안나 G를 보면 덤덤하게 대하기보다는 누구나 정답고 따뜻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독일의 미학자 테오도어 립스는 이런 현상을 ‘대상에 몰입해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미적 감정이입(Aesthetische Einfuhlung)’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니까 안나 G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적 감정이입’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 뛰어났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디자인의 성공 뒤에는 그런 인문학적 가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욕구 단계설을 주장했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욕구 단계 중 높은 단계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수수하고 정다워 보이는 안나 G는 높은 단계의 인간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 전까지 세계 디자인의 흐름은 ‘기능주의’였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로 보면 낮은 단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런데 이 안나 G가 등장하면서 세계 디자인은 점차 기능주의 디자인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디자인에 담긴 매력이나 가치를 통해 정신적 만족을 이끌어 내는 디자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령 애플의 아이폰을 보면 기능을 넘어 정신적 만족을 제공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안나 G’를 응용해 만든 ‘안나 공’의 모습. 접었을 땐 단발머리 여성의 얼굴을 한 장식품처럼 보이지만, 펼치면 파티용 디저트 접시가 된다.
‘안나 G’를 응용해 만든 ‘안나 공’의 모습. 접었을 땐 단발머리 여성의 얼굴을 한 장식품처럼 보이지만, 펼치면 파티용 디저트 접시가 된다.

20세기 후반부터 기능성만을 추구해 왔던 디자인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멘디니였다. 안나 G는 사실 세계 디자인의 그런 격변의 중심에 있었던 디자인이다. 보기에는 수수하고 귀엽고 다소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디자인이지만, 실제로 이 디자인은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바꿔 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디자이너 멘디니가 있었다. 그는 안나 G와 같은 디자인들을 끊임없이 내놓으며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바꿨다.

안나 G의 인기가 워낙 대단하다 보니 안나 G를 응용한 여러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와인 오프너 안나 G의 아성을 넘어서는 디자인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안나의 얼굴만으로 디자인된 안나 공(Gong)만큼은 와인 오프너 안나 G를 위협할 만하다. 앞뒤로 안나의 얼굴을 새긴 캐릭터 조각물처럼 보이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주방을 장식하는 훌륭한 소품이 된다. 그런데 사용할 때는 앞, 뒤 양쪽 얼굴이 펼쳐지면서 순식간에 세 개의 접시로 이뤄진 디저트 용기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을 본 사람들이 순식간에 매료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멘디니의 인문학적 힘이 느껴지는 디자인이다.

멘디니 디자인의 인문학적 시도가 가장 처음 시도된 것은 1978년의 프루스트 의자였다. 당시 기능주의 디자인들은 마케팅 전략에 따라 약간의 기능성을 부가해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 멘디니는 여기에 저항하는 의미로 일부러 새로운 형태를 만들지 않고 기존 고가구를 하나 구입해 그 위에 후기 인상주의 작가 조르주 피에르 쇠라의 점묘법을 적용해 색 점만 찍어서 전시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했던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름도 붙였는데,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울고 갈 정도로 실험적인 접근이었다. 원래는 기능주의 디자인을 비판하려던 시도였는데, 뒤샹의 변기처럼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됐다. 그리고 이 의자는 멘디니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됐다. 이 프루스트 의자는 지금까지 색이나 구성을 바꿔서 계속 제작, 판매되고 있다. 1978년의 디자인이 지금까지도 식지 않는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디자인에 담길 수 있는 가치가 기능만이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적 가치에도 열려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디자인이다.

조명 디자인 아물레또는 그의 디자인 중에서도 좀 독특한 편에 속한다. 단 세 개의 원과 직선으로만 이뤄졌는데, 원 두 개는 뚫려 있고, 하나는 무게중심을 잡고 있다. 형태와 색을 다채롭게 구사하는 멘디니의 디자인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심플한 디자인이다. 그래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부피감이 전혀 없고, 살포시 날아든 학처럼 고고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그런데 눈과 책 사이에 램프헤드를 두고 독서를 해보면 멘디니에게 진정 감사하게 된다. 그가 기능성에 대해서도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디자인이다.

멘디니는 원래 건축을 전공했다. 그래서 그는 건축이나 인테리어 디자인도 많이 했는데 그가 디자인한 비블로스(Byblos) 호텔은 그의 모든 것이 다 표현돼 있는 충격적인 결과물이다. 그가 큐레이팅한 유명한 순수미술 작품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고, 디자인 역사에 길이 남을 명품 의자들이 바닥을 채우고 있는 르네상스 건축물의 로비 풍경은 어떤 디자인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다. 모두 멘디니가 직접 선별하고 배치했다고 하는데, 예술과 디자인과 고전에 대한 그의 높은 교양 수준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디자인은 마케팅이나 테크놀로지로 만들어질 수 없다. 디자인은 기술이 아니라 문화가 만든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까르띠에를 위해 디자인한 조형물은 멘디니의 디자인 중에서 가장 비쌀 것이다. 까르띠에의 창고에서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채 보관돼 있던 각종 보석을 본 순간 멘디니는 이 아이디어를 생각했다고 한다. 화려한 보석들을 투명한 유리 실린더에 넣고, 이들을 둥근 형태로 모아서 큰 탑을 만들었다. 그래서 밝은 곳에서는 보석의 아름다운 빛깔을 그대로 볼 수가 있고, 어두운 곳에서는 불빛을 받은 수많은 보석이 번쩍거리면서 자아내는 웅장하고 화려한 빛의 교향곡을 볼 수 있다.

디자이너 멘디니는 이처럼 다양한 디자인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디자인 흐름을 만드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런 움직임을 바깥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영향은 단지 색다른 양식 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며, 궁극적으로 기능주의라는 획일성에 갇힌 디자인을 다양한 인문학적 가치를 향해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멘디니는 그런 세계적인 디자인의 흐름을 맨 앞에서 이끌었으며 오늘날 인문학적 가치를 가진 디자인들이 탄생할 수 있는 산파 역할을 했던 디자이너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지난해 유명을 달리하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영원히 남게 됐다.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세 개의 원과 두 개의 직선으로만 이뤄진 전등 ‘아뮬레토’와 함께 한 멘디니의 모습.
세 개의 원과 두 개의 직선으로만 이뤄진 전등 ‘아뮬레토’와 함께 한 멘디니의 모습.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1931∼2019)

- 이탈리아 밀라노 출생.

- 세계적인 건축잡지 ‘Casa Bella’ ‘Domus’의 편집장을 지내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이탈리아의 브랜드들과 연결시켜 줌.

- 1975년 이탈리아의 디자인 혁신 그룹 ‘Alchimia’를 설립하고 실험적인 디자인들을 하면서 이탈리아 현대 디자인을 이끎.

- 1989년 자신의 디자인 아틀리에를 설립하고 ‘안나 G’와 같은 디자인을 내놓으며 활약, 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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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196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에서 공업 디자인을 전공했다. 학부생 시절 자국의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활동하던 이탈리아와 일본의 디자이너들을 보면서 한국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디자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다. 연세대·이화여대·국민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서울대, 성균관대 등에서도 강의했다.

현재까지 ‘Good Design’ ‘르 코르뷔지에 vs 안도 타다오’ ‘알레산드로 멘디니’ ‘디자인 인문학’ ‘한국 문화 버리기’ ‘끌리는 디자인의 비밀’ ‘한류미학’ 등 총 11권의 저서를 냈다. ‘한류미학’(더블북)은 총 5권의 분량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뛰어난 문화적 성취를 디자인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최초의 책으로, 현재 선사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를 다룬 1권이 출간됐다. 현재 한국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브랜드 ‘홋 컬렉션’을 설립해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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