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프릿 바라라 지음│김선영 옮김│흐름출판
트럼프에 해임된 美엘리트 검사
진영갈등서 촉발된 법 위기 진단
정치적 경쟁자 악마 만들기 몰두
적이냐 동지냐 따라 정의 달라져
법정은 진실·교양·존엄 추구
인신공격 아닌 이성적으로 논박
공정한 절차 지켜야 결과도 정당
“진실과 전문성을 점점 경멸하는 분위기다. 어디를 가든 엄밀성이 부족하다. 우리는 거짓에 둘러싸여 있고, 절대로 거짓을 바로잡지 않는다. 정의의 개념도 뒤집힌 것 같다.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정의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흐름출판)의 서문을 읽다가 문득 ‘우리나라 얘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저자는 미국에서 ‘가장 저돌적인 검사’로 꼽혔던 프릿 바라라 전 뉴욕남부지검장이다. 월가의 내부자 거래 악습을 파헤쳐 헤지펀드계의 거물을 포함해 71명을 기소, 67명의 유죄 평결을 받아낸 공로로 2012년 타임지(誌)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자신을 검사장에 앉힌 민주당 소속 10명을 포함해 17명의 유력 정치인을 기소할 만큼 중립적인 기소권 행사로 정평이 났는데,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초반 갑작스럽게 해고돼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미국 엘리트 검사의 글이 즉각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진영 갈등과 포퓰리즘, 가짜뉴스 등으로 인한 법과 정의의 위기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인 현상인 까닭일 터다. 실제로 저자는 ‘젊은 검사들을 위한 신선하고 이상적인 일종의 지침서’를 염두에 두고 집필을 시작했다고 밝혔지만, 결과물은 그 이상이다. 혼돈의 시대에 법치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면서 진실 추구와 서로에 대한 존중, 진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극단적 정치 갈등과 법치의 위기, 검찰 개혁을 둘러싼 갈등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요구되는 바다.
서문의 분위기가 보여주듯, 저자의 현실 진단은 우려로 가득 차 있다. 주목할 것은 미국이 겪고 있는 신뢰의 위기가 법의 실패나 사법절차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법체계는 편협함과 그릇된 선입견, 편파적 태도, 사익으로 정의에 접근하는 사람들 때문에 곧잘 훼손된다. 문제의 원인이 시스템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이들은 사법체계를 진실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여기기보다, 남들을 짓누르고 뭔가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 흔히들 정의는 실현해야 할 뿐 아니라 그 과정이 눈에 보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많은 사람은 공정한 절차를 보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이면 다 된다는 식의 ‘법 만능주의’는 허상에 불과하다. 훌륭한 조리법이 맛있는 음식을 보장하지 못하듯, 현명한 법도 정의를 장담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손길을 타지 않은 법은 보관함에 담긴 바이올린처럼 아무 생명력도 없고 영감도 주지 못한다. 법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거나 존경하도록 강제하지 못하며, 증오를 없애거나 악을 정복하지도 못한다. “매일매일 법의 최고 목표를 달성하는 주체는 잘하든 못하든 인간이다.”
법과 제도는 그것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진정성과 도덕성, 양심에 따라 정의로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식은 “기본으로 돌아가 정의의 의미를 되짚어 보자”는 제언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를 강조한다. 그 가치란 “우리의 경쟁 상대는 적이 아니라는 것, 법은 정치적 무기가 아니라는 것, 객관적 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 공정한 절차는 문명사회에서 필수라는 것” 등이다.
저자는 “법정에서 논박이 이뤄지는 방식은 설득과 진실, 교양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며 대중들이 재판 등 사법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해하는 게 정의 실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즘 대중 사이에서 논쟁으로 통하는 것들 중에는 법정에 가면 제대로 된 주장으로 취급받지 못할 만한 것이 많다. 또 정치인과 TV 논평가들의 의견도 법정에서라면 진실을 왜곡하고 노골적인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할 만한 것이 적지 않다.” 의견 충돌과 논쟁을 해결하되 조롱과 인신공격이 아닌 이성과 근거로, 과장되고 분노 섞인 발언이 아닌 차분한 사고에서 나온 주장을 통해야 한다는 얘기다. “상대방을 ‘저능아’라고 부르거나 험담해서도 안 되고, 기소에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적지 않은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대중의 사법 경시 풍조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애초의 목적이 검사를 위한 지침서인 만큼, 법집행자로서 검사가 명심해야 할 원칙들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례를 통해 제시돼 있다. 답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열린 자세’로 확증편향을 경계하고, 진정성과 주체성을 갖고 엄밀함을 추구할 것을 주문한다. 또 가속 페달을 밟는 것 못지않게 브레이크를 밟는 것, 기소 못지않게 불기소 결정을 내리는 용기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더 많은 생각 거리를 주는 것은 저자가 설명하는 ‘배심원 배제 근거’다. 미국 사법체계에서 배심원들은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도 되고, 검사의 외모와 복장을 못마땅해해도 된다. 노트 필기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신중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은 배제 사유가 된다. “제대로 숙고하지도 않은 채 결정을 내리고, 모든 논쟁에서 눈과 귀를 닫으며, 토론 자리에 빠지면 그 사건에 대해 판단을 내릴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사회 전체로 확대하면,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로서 국민의 자격이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428쪽, 1만80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