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가 2020년을 빛낸 ‘올해의 번역서’를 선정했다. 북리뷰팀 소속 3명의 기자와 외부 서평을 담당해 온 출판평론가 2명이 올 한 해 동안 직접 읽고 기사를 쓴 번역서 가운데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5권씩 총 25권을 뽑았다. 문화일보는 지난 18일 출판인 52명의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내 저자가 쓴 ‘올해의 책’ 10권을 선정해 발표한 바 있다.
오남석 팀장, ‘노화의 종말’ 불로장생은 가능한가
좋은 번역서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기자의 두뇌에 가한 충격의 정도로 골랐다.
‘신과 로봇’(을유문화사)은 그리스 신화 속에 담긴, 그러나 많은 이가 주목하지 않았던 과학소설(SF) 코드를 찾아내 신화 읽기의 새 지평을 보여줬다. 이아손과 아르곤 원정대, 천재 공예가 다이달로스, 발명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판도라 등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로봇, 안드로이드(인조인간), 인공지능(AI), 사이보그(인간·기계 혼합체) 등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 다양한 존재가 확인된다. 자연적 생명을 모방·증강·능가하는 인공물에 대한 욕구와 이를 실현하려는 구상이 고대 인류에서부터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노화의 종말’(부키)은 인간 수명 연장을 위한 연구가 노화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규정하는 데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신의 영역에 근접했다는 얘기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웅진지식하우스)은 고대로부터 남성을 인류의 ‘디폴트(기본값)’로 간주한 결과 만들어진 젠더 데이터 공백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한다. 스마트폰 크기, 표준 사무실 온도 등 일상의 기준이 모두 남성에 맞춘 결과라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열린책들)은 이른바 ‘1만 시간의 법칙’을 흔드는 책이다. 한 우물만 파기보다는 경험의 범위(range)를 넓히는 게 성공의 비결이라는 논지는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잘 부합한다.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흐름출판)는 엘리트 검사 출신의 저자가 법 만능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법 조문이 아닌 인간”이라는 통찰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공정하다는…’ 불평등한 현실 직시
글 쓰는 일이 직업이 아닌 사람들도 종종 세미콜론, 아포스트로피, 악센트 등 문장부호를 사용한다. 이를 만든 사람은 바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 출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다. 그는 막 꽃피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를 텍스트로 옮기고자 노력했고, 변방의 학자 에라스무스 등을 ‘국제적인 문학계의 거장’ 반열에 올려놨다. ‘세계를 편집한 최초의 출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 시대의 책은 그 모양이 달랐을 것이다. ‘알두스 마누티우스’(길)는 책을 통해 세계를 열어간 한 인문주의자의 삶을 오롯하게 복원했다.
‘명랑한 은둔자’(바다출판사)는 코로나 정국을 지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책이다. 저자 캐롤라인 냅은 알코올 중독과 거식증으로 고립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절망의 시간들 속에서 저자는 ‘고독’을 연습했고, 그리하여 명랑한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향모를 땋으며’(에이도스)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말로 ‘어머니 대지님의 머리카락’이라는 뜻을 담은 식물 향모에서 배우는 삶의 가르침이 가득한 책이다. 토박이 지혜로 번역된 원주민들의 삶은 호혜성의 원칙이란 무엇인지 보여준다. 로빈 월 키머러는 과학적 엄밀함과 토박이 지혜에 대한 혜안을 아우르며 현대인의 삶에 꼭 필요한 지침들을 빛나는 문장들로 전해준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와이즈베리)은 우리 사회 화두인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적확한 이해가 돋보이고, 브리 리의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카라칼)은 여전히 사회 기저에 똬리를 튼 여성에 대한 불평등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박동미 기자, ‘험블 파이’ 기상천외한 숫자 이야기
웃겼던 순이다. ‘웃긴’ 책이고, 좋은 책이다. ‘험블 파이’(다산사이언스)는 온갖 종류의 ‘수학적 실수’를 파고드는 책인데, 저자(매트 파커) 자체가 좀 웃긴 사람이다. 취미가 동전을 수천 번 튕겨 앞면과 뒷면이 나오는 횟수를 세는 일이라니. 79만 명(기사를 쓸 당시엔 59만 명이었는데!)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이고, 재기발랄한 글만큼 풍부한 ‘입담’으로 ‘수학 스탠딩 코미디 쇼’도 종종 연다. 돈도 많이 버는 것 같다. 지루할 법한 숫자 이야기를 기발하고 기상천외하게 풀어내는 책은 교훈이나, 위로를 주진 않지만, ‘몰입’이라는 순수한 독서 경험을 준다. 잠시, 세상 시름 잊고, 웃고, 조금 똑똑해진다. ‘태어난 게 범죄’(부키)는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토크쇼 진행자 트레버 노아의 자전 에세이다. 책은 웃기고, 또 울린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주민 엄마와 스위스인 아빠 사이에서 ‘불법’적 존재로 태어난 노아가 ‘웃긴 사람’으로 무럭무럭 자라 나에게 웃음을 줬다. 훌륭하다. ‘비극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너무 비통해하지 않는 것’. 노아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그 말’ 멋지다. 하루키가 아버지와의 일화를 회고한 ‘고양이를 버리다’(비채)와 말괄량이 삐삐를 쓴 린드그렌의 평전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창비)은 툭하면 길고양이를 집에 데려와 기르겠다고 떼를 써 혼났고, 그래서 거꾸로 어른들을 잘도 혼내는 삐삐가 멋져 보였던, 유년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건 길 찾는 능력 덕이라는 ‘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어크로스)은 웃음과 절망을 동시에 준 책이다. 그럼 길치인 난 영영 주인이 될 수 없는 건가.
장은수 출판평론가, ‘가난 사파리’ 인간 파괴하는 빈곤
코로나 팬데믹 시대다. 전염병의 역사를 다룬 책이 쏟아졌다.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푸른역사)는 독특하다. 무역, 즉 국제 정치·경제 질서라는 차원에서 팬데믹을 다루기 때문이다. 무역의 통로는 늘 감염의 경로였다. 중세 말까지 전염병에 봉쇄로 대응했으나, 세계화는 이를 무력화했다. 봉쇄로 인한 혼란과 피해가 너무 커진 데다 교통혁명으로 감염 속도가 방역 속도를 쉽게 추월한 까닭이다. 1851년 파리국제위생회의 이후, 봉쇄를 대신해 전 지구적 협력과 연대가 전염병 대응의 기본이 됐다. 전염병이 인류를 하나로 만들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김영사)는 팬데믹의 근본 원인이자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을 기후재난을 다룬다. 지난 50년 동안 인구가 두 배로 늘고 식량 소비가 몇 배 증가하는 등 인간이 풍요를 누릴수록 지구는 점차 피폐해졌다. 더 적게 소비하고 더 많이 나누는 삶이 닥쳐올 재난을 막는 유일한 대안이다.
‘가난 사파리’(돌베개)는 빈곤의 재난을 이야기한다. 가난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면서 외면하는 우파는 물론이고 사파리 동물 구경하듯 가난을 소비하면서 중산층 정체성 정치에 몰두하는 좌파도 빈곤을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은 빈곤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가난의 내부로부터 생생히 보여 준다.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생각의힘)은 성장보다 빈곤의 해결과 행복의 증진에 중심을 두고 해결책을 고민하는 현대 경제학의 흐름을, ‘진리의 발견’(다른)은 시대에 앞서 세계의 진실을 찾아 날아갔던 지성의 아름다운 날갯짓을 그려낸다.
나윤석 기자, ‘두번째 산’ 함께 살아가기의 기쁨
언젠가부터 친구들을 만나면 부동산과 주식 얘기만 한다. 같은 사람들인데 15년 전엔 안 그랬다. 당시 우리들의 술자리는 늘 ‘사랑’에서 시작됐다. 누군가는 막 성사된 연애의 기쁨을 자랑하려고, 누군가는 구애에 실패한 아픔을 위로 받으려고 친구를 호출했다. 그때 우리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처럼 사랑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사랑은 왜 끝나나’(돌베개)를 읽으며 낭만적 사랑의 종말이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님을 알게 됐다. 책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랑을 쾌락만 추구하는 만남으로 바꿔놓았는지 성찰한다. “헌신의 수준을 높이는 관계 맺기가 시급하다”는 문장에 밑줄 그으며 친구들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사랑은 왜 끝나나’가 사랑의 부재를 쓸쓸히 곱씹게 했다면, ‘두 번째 산’(부키)은 나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준 책이다. 세속적 욕망을 따라 ‘첫 번째 산’을 오르다가 문득 회의감이 솟을 무렵 고개를 들면 ‘두 번째 산’이 보인다. 이곳에선 출세보다 베풂이, 개인만큼 타인과 이웃이 소중하다. 나눔은 가족과 주변인을 통해서도 실천할 수 있는 가치이기에 누구나 ‘두 번째 산’을 오를 수 있다. 아직 첫 돌이 안 된 딸이 훗날 아빠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준다면 그 작은 씨앗은 이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쌓여가는 책들 중에 국민성의 차이를 분석한 ‘선을 지키는 사회, 선을 넘는 사회’(시공사), 자연에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혁명에 대한 ‘자연의 권리’(교유서가), 아버지의 성폭행을 아버지의 시점으로 참회한 ‘아버지의 사과 편지’(심심)도 오래 곁에 두고 싶은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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