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황정옥 님께
혼자 지내시는 엄마를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면서 어쩌다 가는 날은 엄마에게 있는 대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거실에는 흰머리와 먼지가 엉켜 굴러다니고 설거지해놓은 접시엔 고춧가루가 묻어 있다. 깔끔한 엄마가 왜 이러나 싶어 핀잔만 했지 백내장 때문이란 걸 몰랐다.
“엄마 거실에 안 어울리게 사진을 왜 저렇게 높이 달아놨어?”
거실 텔레비전 위 벽에 A4용지 크기의 흑백사진 액자가 붙어 있었다.
“사진첩에 있는 게 너무 낡고 잘 안 보여서 사진관에 가서 확대해 왔지.”
비딱하게 걸려 있는 액자가 눈에 거슬려 옮기려는데 엄마가 극구 말리셨다.
“그냥 둬. 거기 있어야 잘 보이지. 텔레비전 보다가도 아빠 얼굴 한 번 쳐다보고 소파에 누워서도 쳐다보지.”
“아이고, 웬 청승이야.”
“있을 때 잘해줄 걸 하는 후회가 돼서 사진 쳐다보며 가끔 아빠한테 얘기해.”
엄마는 술만 취하면 폭력을 일삼던 아빠, 분을 참지 못해 번번이 직장을 옮겨 다니던 아빠, 지금은 과거의 사람이 된 아빠를 사진을 보며 추억하고 계셨다.
일찍 혼자가 되신 외할머니는 홀로 삼 남매를 키우느라 시장에서 생선을 파셨다. 외할머니가 시장에 가면 맏이인 엄마는 두 동생을 챙겨 학교에 다니며 집안일을 도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엄마는 중학교 진학을 남동생에게 양보해야 했다. 공부하고 싶다고, 학교에 보내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외할머니의 결심은 변함이 없어 엄마는 매일 뒷산에 올라가 울었다. 1년을 울며 졸랐던 엄마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시던 이모부를 통해 병원에서 숙식하며 간호 일을 배우는 거였다. 낮에 간호 일을 배우고 밤에 공부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휴가를 받아 집에 내려간 지 이틀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 휴가가 엄마에겐 축복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병원으로 돌아갔지만, 전쟁통에 자격증을 따지 못한 엄마에게 병원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고향 마을 작은 병원에서 일하게 됐고 옆 동네에 살던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꽃길만 걷게 해 줄 것 같았던 아빠는 당신 몫의 고통을 토해내느라 평생을 보냈고 엄마는 거칠고 고된 길을 믿음으로 참아내며 삶의 무게를 지탱하셨다.
며느리가 30여 년 다니던 학교를 명퇴하던 날, 매일 아침 아들 집으로 출근하며 살림과 손주들을 맡았던 팔순 중반의 엄마도 자동으로 퇴직하셨다. 늦잠을 자도 되니 홀가분할 것 같다던 엄마는 금세 당신 손길이 필요한 일을 도둑맞은 듯 허전해 하셨다.
“자식 키우느라 반평생, 손주 키우느라 반평생…. 내 인생은 없더라.”
억척스럽게 살아온 엄마에게 찾아온 허전함은 엄마를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외로움은 어이없게도 그토록 미워하던 아빠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사진 속에선 아빠도, 엄마도 수줍은 듯 밝게 웃고 있다. 나도 슬쩍 사진을 휴대전화에 담아 집으로 돌아와 30호 화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생 전체였으면 좋았을 그 푸르른 날의 행복을 서툰 솜씨로 종이에 옮겼다. 남편, 자식, 손주에게 자신의 삶을 다 내어주고 정작 주어진 당신의 시간엔 허전함과 쇠한 몸밖에 남지 않은 엄마에게 당신의 푸르렀던 젊은 날을 선물했다.
엄마! 엄마의 시간이 다 사라지기 전까지 푸르렀던 기억으로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고통의 순간들을 다 지내고 나서 이 세상에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다고 모든 게 감사하다고 늘 고백하시는 엄마. 엄마의 삶이 우리의 방패가 되고 요새가 돼 삼 남매와 손주들이 감사한 오늘을 살고 있어요. 기억의 끈이 끊기지 않고 천국 가는 그날까지 엄마의 모든 순간이 푸르기만 하길 기도합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큰딸 조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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