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손주 김지안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바로 정년이 그것이다. 낯익은 의자며 책상 그리고 일정한 공간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조용히 떠나야 한다. 그 순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허무가 강물처럼 밀려온다. 우리나라는 정년이 60세다. 그러나 요즘 60은 너무도 젊다. 창창한 20∼30대와 맞서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가슴을 찢고 나올 것 같다. 젊은 친구들과 팔씨름을 해도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있음에도 법이 정해 놓은 현실은 냉정하고 차갑다.

정년 후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생계를 위해 다시 ‘알바’를 하고 취미 생활로 바쁘게 사는가 하면, 좀 여유가 있는 친구는 여행하고 글을 쓰며 노후를 보낸다. 그러나 노후 준비가 전혀 안 된 친구는 심한 우울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는 경우도 많다. 특히 요즘 코로나19로 일찍 퇴직한 친구들은 누구를 원망할 틈도 없이 위로의 술잔에 노후의 길을 묻는다.

나는 정년 후 새 직장을 일찍 준비해 왔다. 이 직장은 최소 10년은 보장된다. 일이 어렵지도 않다. 윗사람 눈치를 잘 살펴 비위만 잘 맞추면 절대 중도 퇴직이 없는 붙박이 직장이다. 웃음이 있고 향기가 있고, 나이를 잊게 하는 마력의 직장이다. 이 직장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 아니, 원하면 저절로 생기는, 어쩌면 80세 90세까지 근무가 가능한 신이 내린 직장이다.

어쩌다 상사가 ‘꼬라지’를 피울 땐 사표를 내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투정을 잘 받아넘기면 금방 웃음이 나오는 만사형통의 직장이다.

나는 오늘도 그 직장을 향해 오전 7시에 집을 나선다. 직장이 있는 서울 발산동에 도착해 윗분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깨어나면 씻기고 밥 먹이고, 오전 10시에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상사 근무지에 데려다준다. 그로부터 그 윗분이 끝나는 오후 4시까지 마트에 가서 고기와 야채, 과일을 사다가 냉장고를 채워 놓고 또 세탁기를 돌려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한숨 늘어지게 자기도 한다. 때론 책도 뒤적거린다. 윗분 눈치 안 보며 일하는 이런 무릉도원의 자유로움은 옛날 직장에선 꿈도 못 꿔본 일이다.

오후 4시 어린이집은 분주하다. 젊은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로 눈인사를 하며 각자 윗분들을 모시고 총총 사라졌다가 다시 바로 옆 놀이터로 모인다.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 타고 줄넘기를 하는 모습에서 60년 전, 나 어릴 적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모습이 투영된다. 내 손가방 속에는 항상 빨간약과 붕대, 반창고가 들어 있다. 순간 어느 윗분이 다치기라도 하면 나의 손은 하얀 간호사가 된다. 조금만 다쳐도 나에게 달려오는 윗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스스로 택한 향기로운 이 직업에 만족을 느낀다.

나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 행복이란 내 삶의 가치 기준에 맞으면 바로 그게 행복이다.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척도가 다르다. 많은 부와 높은 명예를 원하는 사람도 있고, 없어도 남을 돕는 데서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정년 후 내 노후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내 행복은 올해 6살인 윗분(?)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에 있다. “하뻐지, 나 키 컸어?” 오늘도 아침에 재보고 저녁에 또 재보는 키 높이 벽에 삐뚤빼뚤 그려놓은 까만 선들이 내 얼굴의 주름들을 하나둘 펴 준다.

출판인 김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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