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니니

지독한 근시로 악보 못읽어
성악가의 기교 부리기 불허
작곡가가 적은대로만 연주


1886년 6월 30일, 로시 오페라단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공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휘자는 리허설 도중 단원들과 마찰을 빚게 됐다. 사태는 점점 커져 급기야 가수들의 보이콧 선언으로까지 이어졌다. 지휘자는 리더로서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부랴부랴 부지휘자 아리스티데 벤투리가 포디엄(지휘자가 오르는 단)에 올랐지만, 불같은 성격의 브라질 관객들은 수준 이하의 지휘자에게 야유를 퍼부었고 그마저 무대에서 쫓겨나오듯 내려왔다. 이제 더 이상 대타로 나설 지휘자가 없는 상황에서 한 오케스트라 단원은 한 명의 첼리스트를 지목하며 소리쳤다. “저 젊은 첼리스트에게 지휘를 맡겨보면 어떻겠소? 저 청년은 우리 오케스트라에서 유일하게 스코어(악보 총보) 전체를 외우고 있는 사람이오.” 단원들은 하나둘 그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고 이제 겨우 19세의 첼리스트는 등 떠밀리듯 무대에 올랐다. 지휘봉을 잡은 첼리스트는 곧장 보면대의 악보를 덮어버리더니 3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악보를 들춰보지 않은 채 오페라를 마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일화는 20세기 최고의 지휘자이자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거장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의 데뷔 스토리다. 19세의 첼리스트 토스카니니는 보면대의 악보조차 읽을 수 없는 지독한 근시였다. 그는 자신의 파트를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악보를 통으로 외웠고 심지어 첼로 파트뿐만 아니라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전 파트 수십 대의 악기를 위한 모든 음표를 토시 하나 빼놓지 않고 섭렵했다.

그는 또 원칙주의자였다. 리허설 내내 “노(No)! 노(No)!”를 연발하며 단원들을 닦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단원들은 뒤에서 그를 “토스카노노”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토스카니니는 작곡가가 악보에 적어놓은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가 악보에서 티끌만큼이라도 벗어나면 불호령이 떨어졌고 성악가들이 기교를 뽐내기 위해 음을 길게 끈다거나 자의적으로 템포를 늦추는 것 또한 그의 앞에선 절대 불가였다. 혹자들은 그의 원칙주의를 독재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 근본은 음악과 작곡가들에 대한 존경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1926년 4월 25일 밀라노 라 스칼라 가극장.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이탈리아 자코모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가 초연됐다. 푸치니는 투란도트의 3막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푸치니가 남긴 스케치나 패턴을 연구한 프랑코 알파노에 의해 완성됐다. 관객들의 기대 속에 대작곡가의 유작이 연주됐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3막에 이르러 여주인공 ‘류’가 숨을 거두는 신에 이르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그때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갑자기 지휘봉을 내려놓더니 객석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푸치니가 작곡한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렇게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와 그가 남긴 유작에 경의를 표한 뒤 조용히 무대를 빠져나갔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오늘의 추천곡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남성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찬 고대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는 자신에게 청혼해 오는 남성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냈다. 세 가지를 모두 맞히면 그 사람과 결혼하겠지만 이를 풀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조건을 내건다. 아름다운 투란도트의 미모에 반해 수많은 남성이 청혼하지만 선문답과 같은 수수께끼에 모두 실패하고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방(異邦)의 왕자 칼라프가 나타나 세 가지 답을 모두 맞히고 사랑을 고백하자 마침내 차가웠던 투란도트 공주도 마음을 열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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