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지난해 9월, 한 출판사로부터 추천사 요청을 받았다. 그때 즈음 난생 첫 강연을 준비하느라 진을 쏟을 때였다. 강연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모든 일정이 밭게 느껴졌던 때라 사실 거절하려고 했다. 출판사가 요청한 추천사는 번역 출간을 앞두고 있는 일본 작가의 소설이었다. 메일에는 내가 이 책을 마음에 들어 하리라는 어떤 확신과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수록된 여섯 작품의 간단한 소개와 함께 ‘테드 창의 작품이 은회색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 작품은 어쩐지 노을색 같은 느낌이 있다’는 말과 ‘과학소설(SF)신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소녀들의 활약상을 보는 쾌감도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 두 문장을 보고는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라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담당자가 보여주는, 책에 대한 강한 확신과 믿음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소설은 한국에서 출간됨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한나 렌의 SF집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엘리)이다. 한나 렌은 이미 ‘2019년 일본 SF 최고의 서프라이즈’라는 평을 받은 바가 있다. 미리 받은 PDF파일 형태의 소설을 읽고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이렇게 훌륭한 소설을 추천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온 것에, 그리고 그걸 놓치지 않은 것에. 여섯 편의 소설은 독서와 독서 사이에 시간을 두어야 할 정도로 개성이 뚜렷하다. 평행 세계를 매끄럽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능력을 잃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대체역사물로 1902년 한 여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역사 비평서 형식으로 쓴 ‘제로연대의 임계점’, 뇌과학 인플랜트를 통해 인간성에 대해 묻는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 자살한 동생이 남긴 편지를 통해 죽음의 목적을 파헤치며 사람의 뇌를 조종하고 세뇌시킬 수 있는 언니의 여정이 그려진 ‘홀리 아이언 메이든’, 냉전시기에 인공지능(AI)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버린 대체역사를 그린 ‘싱귤래리티 소비에트’, 그리고 시간의 저속화를 그린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

수록된 단편 모두가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읽혔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마지막 작품인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를 꼭 숨죽여야 할 것 같은 적막한 공간에서 읽기를 추천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시간의 저속화’가 무엇인지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을 것이다. SF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쾌감이 담겨 있는 책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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