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잠만 자던 집은 일·사교·운동 등 보다 많은 기능을 가져야 한다.
더 많은 요구를 더 넓은 공간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이제 모순이다.
시간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수렴하고, 집에서 자연의 변화를 수용하는
韓 전통주거 전일적 세계관을 통해 팬데믹의 내면을 확장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주거라 함은 주로, 14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왕조인 조선의 문반과 무반의 집을 대상으로 한다. 당시의 주류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으로서 인간과 자연을 기(氣)와 리(理)로 설명하고자 했다. 리는 우주의 보편적 법칙이고, 기는 물질이 성립하는 근본적인 토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나눠서 생각하지 않는 통합적 성격이 짙었고 자연스럽게 성리학자들은 필요에 따라서 기계공학자이자 철학자였고, 문학과 미술, 음악에 정통했으며 생물학자였고 정원사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상을 오래 관찰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속성을 정확히 파악해서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거기서 근본적인 원리를 추출해냈다. 당연히 그들이 살았던 집은 연구소이자 세미나의 장소였고, 극장이었다.
한국의 전통 주거, 즉 조선 사대부의 살림집은 이러한 다양한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핏 각각의 기능에 따른 개별적인 공간을 갖는 방식이 손쉽게 떠오르지만, 그것은 너무 많은 비용과 자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각각의 기능에 따른 개별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방식 대신에, 하나의 공간을 두고 각각의 기능에 따라 시간을 쪼개서 쓰는 방법을 택했다. 예를 들면, 침실, 거실, 식당, 서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방에서 시간에 따라 각 기능을 전환시키는 방법-나는 지금도 서재에서 잠을 자고, 손님이 오면 같은 공간에서 맞이하고 심지어 거기서 밥도 먹는다―은 사실 그들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수 천 년 동안 한국의 주거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해였다. 그러기 위해서 조선집은 그 공간을 규정하는 특정한 성격이 없어야 했다. 한 공간이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들을 수용해야 하므로 공간에 명확한 성격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했다. 사실 한 가지 기능에 하나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행위와 인식을 입자 쪼개듯 나누어서 각각에 적합한 공간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합리성의 착각이다. 근대는 이 착각을 전지구적으로 확장했다. 그 결과가 공간의 효율을 강조한 고밀도 도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쿠퍼는 “신은 자연을 만들었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구절을 남겼다. 시인이 살았던 18세기에는 산업혁명의 급박한 변화 속에서도 도시 거주비율이 전체인구의 5% 이내였다. 그러나 2018년 한국의 도시 거주비율은 91%가 넘는다.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 10만㎢의 약 16.7%가 도시지역으로, 약 1만7천㎢에 4700만 명이 몰려 살고 있다. 만약 감염과 전염으로 퍼지는 질병이 유행한다 하더라도 나타났다 사라지기만 한다면 어떤 질병도 도시 자체를 크게 위협하지는 못한다. 이제까지 질병으로 완전히 사라진 도시는 거의 없었다. 예로부터 인류를 위협한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천연두, 흑사병, 인플루엔자가 있었지만 이들이 한 도시를 멸망하게 한 일은 없었다. 14세기 동방 무역의 거점이던 이탈리아의 제노바는 터키와 그리스, 지중해의 여러 섬에 흑사병이 만연하자 항구를 봉쇄했다. 흑해 연안을 떠돌며 무역을 하던 배들은 프랑스 마르세유로 갔고, 거기서 다행히 입항허가를 받았다. 그때가 1347년 11월 경이었다. 마르세유는 초토화됐고, 흑사병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스칸디나비아와 모스크바까지 번지며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4분의 1가량인 7500만 명에서 최대 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지금 그 도시들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건재하다. 왜냐하면 도시에는 아무리 엉터리 같은 치료법이라고 하지만 당대의 다양한 의학 지식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 ‘다양한’ 의학 지식들이 거의 아무런 제약도 없이 무차별하게 적용됐고, 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지만 거기에서 얻은 지식도 컸다. 과거의 팬데믹은 ‘신의 재앙’으로도 불리고 ‘개벽의 운수’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인류는 아직 팬데믹의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도시는 그때와는 다르다. 더 밀집해 있고, 더 커지고, 공공의 이익과 그에 따른 인권의 문제, 어떤 사안에 따른 제도적인 문제도 더 촘촘해졌다. 설사 누군가 백신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용되기에는 많은 복잡한 절차들이 따른다. 그리고 그 절차들에는 누군가의 책임이 따른다. 아무리 신속하게 승인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지금 우리는 질병의 원인도 정확히 알고 있다. ‘인류세’라고 칭할 정도로 팽창한 인간 문명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그 원인이다. 그러나 원인을 안다고 우리가 곧바로 그것을 막기 위한 실천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그 실천은 전염병보다 더 무섭게 지금 당장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현대도시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며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구속한다. 팬데믹은 이 합리성과 효율성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것들 스스로가 거기에 구멍을 내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건축가 함성호
함성호 / 건축디자인실험집단 EON 대표이자 1990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한 시인. 조선 성리학자들이 지은 건축물을 답사한 ‘철학으로 읽는 옛집’, 공간 예술에 담긴 사회적 담론을 분석한 ‘반하는 건축’ 등 다양한 책을 집필했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 성찰을 위한 액션 플랜
‘팬데믹’은 도심 공원의 접근성 향상, 온라인 소비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물류 전용터널 설치 등 다양한 ‘건축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독일 건축가와 도시 개발자가 쓴 ‘도시의 미래’(와이즈맵)는 인구밀도·기반시설·생태계 등 11개 키워드를 통해 미래 도시의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건물 전면에 있는 숲이 건물의 냉방 시스템을 담당하고, 지하 농장이나 옥상 농원이 식량을 공급하며, 이동수단 발달로 개인 소유 차량이 급감하면서 빈 도로가 공원으로 채워지는 도시를 이상적인 공간으로 제시한다. 숲이 건물을 뒤덮은 밀라노의 ‘보스코 메르티칼레’, 강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다기능 인공 나무인 싱가포르의 ‘슈퍼 트리’ 등 실제 사례를 통해 미래 도시가 실현 가능한 제안임을 설득한다.
문화인류학자 질베르 리스트의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봄날의 책)은 친환경적 도시 설계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책은 ‘발전’이 풍요를 안겨줄 것이라는 맹목적 신앙을 공격하면서 프랑수아 페로, 더들리 시어스, 종속학파 등 ‘발전 신앙’의 극복을 시도한 담론들을 소개한다.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을 초래한 ‘발전’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하는 저자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 막다른 길을 다시 측정하자”고 제안한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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