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출신으로 ‘메디컬 리더십’ 정치적 이해득실 따지지 않고 냉철한 분석·처방 등 초지일관
자국 우선주의 기승 와중에도 협력·소통 주도하며 큰 성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1년 동안 전 세계 각국의 ‘방역 성적’이 엇갈리는 가운데, 국가 정상보다 방역·보건 ‘컨트롤타워’가 오히려 대중의 신뢰를 더 받고 있다. 특히 전대미문의 전염병 위기 속에서 전문성에 기초한 냉철한 분석과 판단, 동시에 불안한 대중의 심리를 달래면서 백신 확보에 주력한 의사 출신 3인방의 리더십이 두드러졌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존 응켄가송 아프리카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소장,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이 주인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학적인 근거와 전문성을 기반으로 감염병 확산에 대응했다는 것. 의사 출신답게 의료 현실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일관된 방향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메디컬 리더십’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42세에 정계에 진출하기 전 산부인과 의사 겸 의대 교수였다. 비뇨기과 의사였던 응켄가송 소장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와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를 연구해왔다. 감염병 전문의인 파우치 소장은 53년간 NIAID에서 일했으며 에이즈·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신종 인플루엔자A·에볼라·지카 바이러스 등에 주도적으로 대처했다. 이런 경험 덕분에 이들은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신속하고 단호한 지침을 내렸고, 바이러스 진단·추적은 물론 진단키트·백신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또 이들은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나 지지자의 표심을 의식하지 않았다. 팬데믹 상황에서 정치적 득실을 따지던 각국 지도자와는 큰 차이를 보인 셈이다. 이들은 코로나19 사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고, 과학에 근거해 방역 해결책을 모색했다. 많은 시민이 대통령이나 어떤 정치인보다 이들을 믿었던 이유다. 감염병 전문가인 조너선 퀵 듀크대 국제보건대학원 교수는 최근 발간한 저서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팬데믹이 되려면’에서 “내가 최고로 꼽는 지도자들은 부정, 안이함, 정치적 이해, 사리사욕을 초월하고 국민의 안녕을 우선시한다. 최고의 지도자는 과학적 증거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이해를 계산할 때 이들은 감염 위기로 분열된 상황에서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휘했다. 자국 우선주의가 기승을 부려 각국의 협력·연대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EU 회원국의 백신 공동 구매·동시 접종을 성사시켰다. 국가 간 빈부 격차가 의료 격차로 나타나자 응켄가송 소장은 “의료물자 협상을 위해서는 뭉쳐야 한다”며 아프리카 54개국의 협력을 이끌었다.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 같은 기본적인 방역 수칙이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된 미국에서 파우치 소장은 언론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중과 소통했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를 몸소 실천했다.
정확한 진단과 투명한 정보공개 복잡한 과학지식도 능숙한 전달
‘미국의 의사’라는 별명이 붙은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마스크·백신 관련 음모론으로 분열된 미국에서 끊임없이 방역수칙을 강조하고 미국의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소통형 전문가다. 백신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종식하기 위해 직접 공개 접종을 받았고, 미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의 심각성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려 신뢰를 받고 있다.
파우치 소장의 강점은 대중과의 소통 능력이다. 그는 간결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해 복잡한 과학 정보와 전문지식을 능숙하게 전달한다. 감염병 전문가 조너선 퀵 듀크대 국제보건대학원 교수는 “공중보건 지도자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며 “감염병이 발생하는 동안 예방과 대응에 필요한 방역수칙을 계속 홍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파우치 소장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시민들이 자신을 지킬 방법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전문가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백악관 코로나19 브리핑에 초대받지 못하게 되자 파우치 소장은 개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적극적으로 미국의 감염 상황을 알리고 방역수칙 준수를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자신의 팔순 생일잔치를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으로 열어 사회적 거리두기의 모범도 보였다. 백신을 대량으로 확보했으나 미국인들의 불신이 큰 상황에서 접종을 장려하기 위해 지금도 연일 백신의 안전성을 홍보하고 있다.
파우치 소장 리더십의 요체는 ‘투명한 정보 공개’인 셈이다. 침착하고 솔직한 태도로 “미국의 코로나19 감염은 통제 불능에 접어들었다”면서 현실을 일깨워주는데, 오히려 미국인들은 이를 통해 불안을 해소했다. 거짓 정보보다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정확히 알리는 지도부를 원하기 때문이다. 파우치 소장은 소문과 가짜뉴스에는 어김없이 경고를 날렸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54개국 협력 이끌며 신속한 진단과 의료물자 확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아프리카 방식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는 아프리카의 통합으로 찾을 수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공동 방역을 진두지휘해온 존 응켄가송 아프리카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소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로 자국 중심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도 아프리카 54개국의 협력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먼저 응켄가송 소장은 코로나19가 발병하자 신속한 진단검사 시행과 의료물자 확보에 우선순위를 뒀다.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연구하며 아프리카에서 10년 동안 1200만 명이 치료제를 구하지 못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몸소 현장에서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의약품과 마스크, 인공호흡기 등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을 본 그는 국제관계에 균열이 생긴 점도 재빨리 포착했다. 응켄가송 소장이 아프리카연합(AU)에 “선진국에 자선을 요구할 때가 아니다”라며 아프리카 국가 간 연대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유다.
응켄가송 소장은 “아프리카는 진단키트를 지불할 자금은 있지만 구매할 능력이 없다”며 “하나의 큰 고객으로 협상하기 위해 모든 국가가 뭉쳐서 의료물자를 구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AU 소속 54개국은 공공·민간 부문의 구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온라인 플랫폼을 설립했고, 이를 통해 제조업체로부터 신속하게 진단키트와 마스크, 인공호흡기를 구할 수 있었다.
응켄가송 소장은 백신 확보를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언론 인터뷰에서 “코로나19 백신의 아프리카 공급이 지연된다면 도덕적 재앙이 될 것” “부국이 백신을 접종하는 사이 빈국이 고통받는다면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백신 불평등’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했다.
이 덕분에 AU는 저소득 국가를 위해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하는 글로벌 코백스(COVAX) 프로그램과는 별개로 2억7000만 회분의 백신을 확보할 수 있었다.
EU 27개국 다양한 입장 등 조율 美와 최초로 백신 공동개발 공헌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전염병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 백신 개발에 과감히 투자해서 성과를 거둔 대표적 사례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에는 EU의 협력·연대가 실종됐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27개국 회원국 입장을 조율,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는 데 공을 세웠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성공 이유는 면역계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형성시키는 백신이 전염병을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인지했다는 데 있다. 새로운 백신 개발에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코로나19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백신 개발·접종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점을 인식한 뒤 이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접종을 시작한 제약사 화이자·바이오엔테크가 백신을 빠르게 개발할 수 있었던 데에도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지원 덕이 크다. 제약사들이 지난해 4월 임상시험을 시작하며 백신 개발에 대한 가능성을 보이자,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백신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EU 산하 유럽투자은행(EIB)에서 보통 1년이 걸리는 연구·개발비 대출 심사를 2개월로 단축했고, 바이오엔테크에 1억 유로(약 1340억 원)를 대출해줬다. 빠른 자금 조달로 화이자·바이오엔테크는 백신 개발에 탄력을 받았고,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현명한 투자로 EU는 더 많은 생명과 자금을 지켰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자금력과 협상력을 발휘해 EU 회원국에 필요한 10억 명분의 백신을 확보하는 성과도 거뒀다. 코로나19 사태 직후부터 EU 회원국들은 의료물자, 경기부양, 국경 폐쇄 등으로 분열의 기로에 놓여 있었는데 이를 잘 통합한 것. 실제로 프랑스·네덜란드·독일·이탈리아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먼저 도입하려고 했지만,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이를 막아낸 뒤 회원국들의 입장 차를 조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