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승배 정치부 차장

“고장 난 시계처럼 시간의 흐름이 끊어져 있다. 시간이 지나도 망각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과거’를 살아간다. 그렇기에 외상적 기억은 사실상 ‘기억(memory)’이라는 말보다는 ‘재경험(reexperience)’이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외상적 기억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기억의 뇌인 해마가 아니라 정서의 뇌에 저장된다. 2. 떠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3. 유사한 상황 감각, 정서 자극에 쉽게 강화된다. 4. 몸으로 떠올려지는 경험이라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 문요한 씨가 블로그에서 설명한 ‘트라우마’의 특징 중 일부 내용이다. ‘어쩜 이리도….’ 이 글을 읽으며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이 오버랩됐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문 정부 외교의 외상적 기억이라면 2018년 ‘싱가포르 선언’에서 2019년 ‘하노이 노딜’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일 것이다. 문 대통령을 포함해 이 정부 외교를 주도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아픈 기억들이다.

임기 1년을 남겨놓은 이 정부가 실패한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의 미·북 협상을 조 바이든 신(新)행정부에 설득하겠다는 것은 실패한 협상들을 기억의 뇌가 아니라 정서의 뇌에 저장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증세가 처음 나타난 것은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었다. 문 대통령은 회견에서 “싱가포르 선언에서 다시 시작해 보다 구체적 방안을 이루는 대화와 협상을 해나간다면 좀 더 속도 있게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안 있어 트라우마의 주역인 76세의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을 외교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정 장관은 앞서 열린 국회청문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사는 아직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청문회에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이른바 하노이 노딜로 이어진 과정에서 정 장관(당시는 정 실장)이 김정은이 말한 ‘조선반도 비핵화’가 ‘북한의 핵 포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김 위원장이 ‘핵 포기’를 약속한 것처럼 미국에 전달한 ‘배달 사고’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정 장관은 김 위원장을 정말 철석같이 신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정 장관의 ‘김정은 신뢰 발언’이 나오자마자 미국 국무부는 “북한의 불법적인 핵·미사일과 이를 확산하려는 의지는 국제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라고 정면 반박했다. 대북 환상을 버리라는 얘기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cbs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의 ‘선(先) 우라늄 농축 중단’ 조치를 이란핵합의(JCPOA) 복귀 협상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는 북핵협상에도 적용될 것임을 예고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의 회담을 정치적 이벤트로 활용하려던 트럼프가 ‘선(先) 평화체제 후(後) 비핵화’를 허용해준 외교적 실패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향후 미국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가장 큰 현실 앞에 ‘현재적 과거’에 살고 있는 우리 정부의 외교는 정말 고장 난 시계처럼 시간의 흐름이 끊어져 있어 보인다.
방승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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