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 끝 씨앗 창고│캐리 파울러 글, 마리 테프레 사진│허형은 옮김│마농지
국제종자저장고 설립 스토리
100만종·5억개 샘플 보관중
각국 유전자 은행 관리 부실에
유엔 주도 건립…2008년 완공
다양성 보전용 ‘백업 드라이브’
기후변화·核·테러 등에도 안전
새 책 ‘세계의 끝 씨앗 창고’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도 불리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만들어진 과정과 운영 상황을 설명하고, 종자 보존을 위한 국제 공조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책이다. 책의 저자이면서 이 저장고 설치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추진하고 현재는 저장고 운영을 총괄하는 국제자문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는 캐리 파울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행동하는 낙관주의자’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대장정의 씨앗은 1990년대 초반 파울러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 작물 다양성 현황 조사’ 프로젝트를 총괄하면서 뿌려졌다. 유전자은행들에 대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예산 부족으로 냉각장치를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곳이 수두룩했다. 파울러는 “수많은 유전자은행이 은행이 아니라 호스피스에 가까웠다. 몇몇 곳은 영안실이었다”고 당시의 충격을 전했다. 부룬디·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의 종자 컬렉션은 전쟁에, 필리핀 국립유전자은행은 태풍과 화재 등에 찢겼다. 특히 2001년 9·11 테러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를 겪으면서 작물 다양성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 최대한 많은 종자 샘플을, 기후변화·핵전쟁·테러·질병 등 어떤 외부 충격에도 안전하게, 사실상 영원히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파울러와 협력자들은 북유럽 유전자 자원센터(NordGen)가 자사 컬렉션의 중복 표본 1만 점을 스발바르의 버려진 광구에 보관하고 있는 데 주목했다. 얼어붙은 산속에 씨앗을 보관하자는, 과학소설(SF)에나 나올 법한 발상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플라토베르게산은 지리적 위치 자체로 경쟁력 있는 후보지였다. 전쟁이나 테러 위협에서 멀찍이 떨어진 극지이지만, 인구 2200명이 거주하고 공항을 갖춘 롱위에아르비엔의 지척에 있다. 영구동토층 속의 창고는 냉각시설이 고장 나더라도 수십 년 동안은 천연 냉동고로 기능할 수 있고, 기후 온난화로 세상의 모든 빙하와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70m 상승해도 끄떡없다. 결국 유엔 산하 세계작물다양성재단(GCDT)이 2억 달러를 출연하고 노르웨이 정부가 건설비용 900만 달러 전액을 부담하면서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현실이 됐다.
저장고 운영 방식은 은행과 비슷하다. 종자 소유권은 위탁자에게 있고, 언제든 원하면 반출할 수 있다. 실제로 2015년 9월 시리아 알레포에 본부를 둔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의 요구로 시리아 내전으로 손실된 씨앗을 대체하기 위한 첫 종자 반출이 이뤄진 사례가 있다. 위탁자는 종자 배송 비용 등을 부담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위탁 보관은 무료다. 한국도 44종, 2만3185개의 토종 종자를 위탁했다. 북한을 포함해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수집된 작물 표본을 보유하고 있지만, 저장고의 3개 창고 가운데 1개만 사용 중이다. 나머지 2개는 미래를 위한 대비다. 연간 운영 경비도 25만 달러 수준이어서, 지속 가능성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작물 다양성 보전을 위한 백업 드라이브이자, 미래 인류의 생존을 위한 보험과도 같다. 저자는 “이곳은 ‘종말의 날’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아닌, 인류와 작물이 다가올 변화에 더 잘 대비할 수 있도록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사람들이 지어 올린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인구 증가와 발전 속도에 발맞추려면 이번 세기 중반까지 식량을 최소 50%는 증산해야 한다. 2도 혹은 그 이상의 기온변화도 이미 기정사실로 다가왔다. 저자는 “이 현상을 기후변화라 부르건 자연적인 기온 변동, 혹은 그냥 나쁜 날씨로 치부하건 이런 변화를 최전방에서 겪어내는 건 농작물”이라며 “작물의 진화와 환경에 대한 적응은 우리에게, 그리고 작물 다양성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인류 종말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협에 눈 감고 모른 척하는 국제사회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자 희망의 근거다. 세상 모든 작물 다양성을 영구 보전하는 데 필요한 연간 비용은 올림픽 대회를 한 번 여는 것의 50분의 1에 불과하다.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낙관주의자들이 뜻을 세우니 길은 열렸다. 저자는 말한다. “이곳은 심각하게 풀기 어려운 전 지구적인 문제라도 신뢰와 선의, 협력과 끈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풀어나갈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을 현실로 증언한다.” 176쪽, 2만50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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